비상계엄 선포 150분 만에 국회에서 계엄 해제가 결의됨과 동시에 정부가 추진하던 ‘4대 개혁’도 동력을 잃게 됐다. 국회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 추진에 이어 대통령실 참모와 국무위원 전원이 사의를 표명하며 사실상 개혁은 물 건너갔다는 분석이다.
4일 대통령실은 정진석 비서실장, 성태윤 정책실장, 신원식 국가안보실장 등 참모진 전원이 윤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했다고 공지했다. 국무위원 전원도 비상계엄 사태와 관련해 한덕수 국무총리에게 일괄 사의를 표명했다. 한 총리는 “내각을 통할하는 총리로서 작금의 상황에 이르게 된 모든 과정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고개를 숙였다. 앞서 여야는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지 2시간30분여 만인 이날 오전 1시3분쯤 국회 본회의에서 재석 190명 중 찬성 190명으로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가결 처리했다. 윤 대통령은 오전 4시26분쯤 비상계엄을 해제했다.
정부 당국자들의 집단 사의로 국가 컨트롤타워가 혼란을 겪고, 윤 대통령의 리더십이 큰 타격을 입게 되면서 정상적인 국정 운영이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윤석열 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해온 의료·연금개혁은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좌초 수순을 밟을 전망이다.
21대 국회의원을 지낸 신현영 서울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이번 계엄 사태로 정부 부처는 마비되고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식물 정권이 돼 버렸다”며 “의료개혁, 연금개혁 등 정부의 개혁 정책은 물 건너갔다. 이젠 어떤 정책도 추진할 수 없으며 돌이킬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까지 추진했던 개혁은 중단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발생했던 여러 부작용과 피해까지 책임져야 한다”면서 “정권이 바뀌었을 때 어떤 새로운 정책 목표를 세울 것인지 준비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와 있다”고 강조했다.
의료개혁 추진을 당장 중단해야 한다는 요구도 나왔다. 강희경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 비상대책위원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근거도, 국민적 합의도 없이 강행하는 의료개혁을 당장 멈추고 정상적 판단이 가능한 상황에서 새 출발 해야 한다”면서 “국민의 건강과 어린 학생들, 미래 의료의 주역인 젊은 의사들이 더 이상 다쳐선 안 된다”고 적었다.
보건복지부는 의료개혁 과제로 의과대학 입학 정원 증원을 비롯해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 필수의료 보상체계 강화, 비급여·실손보험 개편, 의사 사법리스크 완화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이달 말에는 추가 개혁과제를 발표할 예정이었지만, 현재로선 후속 조치를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전공의 등 의료인은 48시간 내 복귀하고, 위반 시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는 내용의 계엄사령부 포고령을 두고 의료계가 윤 대통령의 탄핵을 외치며 들끓고 있다.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와 전국의과대학교수비상대책위원회(전의비)는 이날 성명을 통해 “사직한 전공의들을 아직도 파업 중인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복귀하지 않을 경우 처단하겠다’는 전시 상황에서도 언급할 수 없는 망발을 내뱉으며 의료계를 반국가 세력으로 호도했다”고 비판했다. 두 단체는 “국민을 처단하겠다는 언사를 서슴지 않는 것은 윤석열 정권이 반국가 세력임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할 대통령이 아닌 반헌법적·반역자 세력임을 자인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금개혁 완수도 안갯속에 빠졌다. 당장 내년 소득대체율이 0.5%p 낮아진 41.5%로 하향 조정이 예정된 만큼 국민연금 가입자가 노후에 받을 수령액 감소는 불가피해졌다. 올해를 넘기면 연금개혁 자체가 불가능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2026년 지방선거 및 재보선, 2027년 대선, 2028년 총선 등 3년 연속 선거가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은 “비상계엄 파동으로 정국이 혼란 속에 빠져들 전망이다. 연금개혁도 뒤로 미뤄질 우려가 있다”면서 “연금개혁은 시간을 늦출 수 없는 절박한 과제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연금개혁안을 발표했으므로 이제 공은 국회로 넘어와 있다”며 “비상계엄 논란과 별개로 조속히 국회에 연금개혁특별위원회를 구성해 합의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의료현장의 어려움은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보건의료노조)은 ‘무기한 파업’으로 윤 대통령 퇴진운동에 나서겠다고 선포했다. 보건의료노조는 성명을 내고 “정권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붙이고, 계엄령으로 반대 세력에 재갈을 물리려는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라며 “국민들과 함께 윤 정권이 망쳐놓은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한 사회대개혁의 대장정에 함께 나설 것”이라고 했다.
전공의 이탈에 따른 의료공백 장기화로 인해 불편을 겪고 있는 환자들은 이번 비상계엄 파동으로 불안감이 더 높아졌다. 김성주 한국중증질환연합회 회장은 “계엄명령 발표 후 환자들은 지금도 진료받기 힘든데 더 어려워지는 것 아니냐면서 불안해했다”라며 “그동안 개혁이라며 일을 많이 벌려놓고, 수습한다면서 낭비한 사회적 비용은 어떻게 다 감당할지 모르겠다.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꼬집었다.
국회와 정치권 소식에 정통한 한 보건의료 관계자는 “윤 대통령이 치명적 악수를 뒀다”고 평가했다. 이 관계자는 “이대로 지역·필수의료를 위한 정책이 원활하게 이뤄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안 든다. 어쩌면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면서 “개혁의 추진 동력을 잃어버렸다. 윤석열 정권의 정당성이 부정당하는 상황에서 향후 어떤 정책이 추진되더라도 보건의료계는 더 강경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짚었다.
느닷없이 나온 비상계엄 포고령이 내년 전공의·의대생 복귀에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지만 복지부는 “의료개혁은 흔들림 없이 예정대로 추진할 계획”이란 기존 입장을 고수하며 별다른 후속조치를 내놓지 않고 있다. 복지부는 이날 오전 긴급 간부회의를 갖고 “취약계층 보호와 필수의료 유지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