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전북본부 데스크칼럼 <편집자시선>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과 현안들에 대해 따끔하게 지적하고 격려할 것은 뜨겁게 격려할 것입니다. 특히 우리 주변의 정치적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전라북도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전북 전주는 매년 연말이 되면 전 국민의 주목을 받는다. 올해는 고물가와 내수 침체, 수출 둔화 등 대내외 악재와 비상계엄과 탄핵정국이 겹치면서 어느 해보다 극심한 불황을 겪고 있지만 어느덧 전주의 ‘선한 상징’이 된 ‘얼굴 없는 천사’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지난 20일 오전 9시 26분께 전주시 완산구 노송동주민센터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중년 남성으로 봐지는 목소리로 “기자촌 한식뷔페 맞은편 탑차 아래 놓았으니 불우한 이웃을 위해 써주세요”라고 말했다.
성금이 든 복사용지 박스에는 금색 돼지 저금통과 5만원권, 편지가 들어 있었다. 금액은 8003만 8850원, 천사가 남긴 용지에는 “소년소녀가장 여러분 따뜻한 한 해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은 지난 2000년 4월 처음 시작돼 올해까지 25년째, 26차례에 걸쳐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00년 당시 한 초등학생을 통해 58만 4000원이 든 돼지저금통을 옛 중노송2동사무소에 보낸 뒤 해마다 성탄절 전후에 선행을 이어오고 있다. 천사가 보내 준 성금은 올해까지 10억 4483만 6520원에 달한다.
얼굴 없는 천사는 언제나 주민센터 인근 특정 장소에 현금과 돼지저금통에 담겨진 성금을 복사용지 박스에 담아 놓고서 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어 위치를 알려주는 식으로 기부를 진행해 왔다.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이 주목을 받으면서 언론이 추적하는 등 한때 천사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시도도 있었으나 천사 본인이 신원을 철저히 감추려는 모습을 보여 중단했다. 전화로 걸려오는 목소리는 20대 여성에서부터 50~60대 남성까지 다양해 한 가족이 선행을 하고 있다는 추측도 나왔다.
선행 10년째인 2009년 기부 때에는 이례적으로 "대한민국 모든 어머님들이 그러하셨듯이 저희 어머님께서도 안 쓰시고 아끼시며 모으신 돈이랍니다. 어머님의 유지를 받들어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여졌으면 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 하늘에 계신 어머님께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어 심금을 울렸다.
전주시는 2009년 9월 얼굴 없는 천사의 뜻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고 노송동 주민센터 일대를 ‘천사의 길’로 명명했으며 기념공원도 조성했다. 기념비에는 ‘얼굴 없는 천사여, 당신은 어둠 속의 촛불처럼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만드는 참사람입니다. 사랑합니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지역주민들은 매년 10월 4일을 '천사의 날'로 정하여 불우이웃 나눔 행사를 진행한다.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은 연극과 영화로도 만들어져 2011년 12월9일에는 전북지역 연극단체인 창작극회가 연극 '노송동 엔젤'을 무대에 올렸으며, 2017년 4월에는 영화 '천사는 바이러스'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전주시 얼굴 없는 천사는 올해 처음 제정된 HD현대아너상의 ‘대상’과 ‘1% 나눔상’의 수상자로 결정돼 시상금 2억원을 전주시에 전달, 얼굴 없는 천사가 평소 밝혀온 뜻에 따라 소외계층을 돕는 일에 사용되기도 했다.
얼굴 없는 천사의 선한 영향력은 전북특별자치도는 물론 전국적으로 확산돼 곳곳에서 익명의 기부가 이어지고 있다. 전북자치도 완주군 비봉면에도 얼굴 없는 천사가 다녀갔다. 지난 20일 완주군 비봉면사무소에 20㎏ 햅쌀 21포대가 배달됐는데, 지난 2018년부터 쌀을 보내와 올해까지 7년간 두고 간 쌀은 51포대, 약 1020㎏에 달한다. 완주군 용진읍 행정복지센터에도 지난 27일 10㎏짜리 백미 60포대(총 600㎏)를 두고 갔다. 이 천사의 선행도 2008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17년째 이어지고 있다.
전북자치도 군산시 나운1동주민센터에도 중년 남성이 오랫동안 정성껏 모아 온 것으로 보이는 오만원권(10장)과 만원권(2장), 천원권(27장), 그리고 동전(8만 2160원)이 담겨 있는 상자를 건네주고 신분 밝히기를 거절하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는 지난 16일 중년 남성이 전화를 걸어와 "사무국 앞 모금함에 성금을 두고 간다”며 전화를 끊었고 상자에는 5만원권 100장씩 12묶음을 비롯해 모두 6054만 7260원의 현금이 들어있었다. 익명을 고집해 온 그가 그동안 기부한 성금만 6억 7200만원에 이른다.
경기도 군포에서는 지난 19일 오후 한 중년 남성이 민원실 창구 직원에게 오만원권 100장이 들어 있는 봉투 하나를 놓고 갔고, 울산 북구 효문동 행정복지센터에는 2013년부터 12년째 매년 11월에 천사가 찾아와 1000만원~2000만원 적지 않은 금액을 익명으로 기부하고 있다.
하지만 올해 전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랑의열매에서 전주오거리문화광장에 설치한 ‘사랑의 온도탑’ 온도는 좀처럼 올라가지 못하고 있다. 올해 전북자치도의 목표액인 116억 1000만원, 그러나 전북의 온도탑 수은주는 30도로 전국 평균 67.3도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사랑의 온도탑은 공동모금회가 연말연시 불우이웃을 돕기 위해 매년 12월 1일부터 두 달간 진행하는 모금 캠페인으로 목표액의 1%가 모일 때마다 나눔 온도가 1도씩 올라가는데, 올 모금액은 지난 23일 기준 34억 8000만원, 목표액의 30%가량 채웠다. 지난해 같은 기간 보다 6.6%나 떨어지는 수치이며, 현금 기부 건수도 지난해 3300건에서 2923건으로 10%가량 감소했다.
62일간 매일 1억 8700여만원 이상 기부가 돼야 목표 온도를 달성할 수 있는데 이 같은 속도라면 지난해보다 모금액이 낮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지난해에도 사랑의 온도가 89.8도에 그치며 사상 처음으로 100도 달성에 실패했다.
전북자치도는 인구 대비 기초수급권자가 전국에서 가장 높은 지역이다. 계속되는 경기침체와 고물가, 혼란스러운 정국으로 기부 심리가 위축되었다고 하지만 어려운 이웃들이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도록 적극적인 참여가 아쉽다.
전주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퍼지는 얼굴 없는 천사의 선한 향기가 연말연시를 보다 훈훈하게 하듯 전북자치도의 사랑의 온도탑도 펄펄 끓기를 기대하면서 지자체도 적극적인 계도 활동에 함께 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