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바이오헬스혁신위원회가 출범하고 ‘신약 혁신 가치 반영’, ‘중증·희귀질환 치료 보장성 확대’ 등의 내용을 아우른 2차 건강보험종합계획이 발표되면서 환자 중심 보건의료정책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정부는 정책 사각지대에 놓인 환자들을 위해 신약이 신속하게 등재 될 수 있도록 제도를 도입하고, 치료제의 건강보험 적용을 확대하기 위해 재정을 적극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힘든 투병 과정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지친 환자들에게 희망이 된 이 약속은 현재 어떻게 이행되고 있을까. 한국의 신약 도입 현황과 급여 현실을 들여다봤다. [편집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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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일본 등 선진국과 비교해 한국의 신약에 대한 급여 지출은 최하위 수준인 것으로 전해진다. 전문가들은 국내 급여 시스템이 개선되지 않으면 글로벌 기업들의 투자가 줄어 결국 제약산업의 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리차드 케인 미국제약협회(PhRMA) 국제정책 담당 부의장은 최근 쿠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국과 약가참조 국가(A8) 간 신약 지출 격차가 계속 확대되고 있다”며 “신약에 대한 투자가 제한적인 상황에서 비용 절감 위주의 가격정책이 유지되다 보니, 한국 환자들은 혁신적인 치료법에 접근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고 밝혔다.
지난해 유승래 동덕여자대학교 약학대학 교수가 진행한 ‘신약의 치료군별 약품비 지출 현황 분석’ 연구 결과에 따르면, 최근 6년간(2017~2022년) 국내 건강보험 재정 중 신약에 대한 지출은 총 약품비 대비 13.5%에 불과했다. A8 국가(38.0%), 경제협력개발기구(OECD)(33.9%)와 비교하면 절반 이하 수준이다. 특히 신약의 가격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약값을 참조하는 A8 국가(영국, 프랑스,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일본, 미국, 캐나다) 평균과의 격차는 점점 벌어져 2022년에는 3배까지 차이가 난 것으로 나타났다.
중증 또는 비용이 많이 드는 질환에 대한 치료 보장성도 떨어진다는 평가다. 급여 적정성 평가 과정에서 경제성평가를 면제받은 의약품이나 필수의약품은 중증질환의 치료 접근성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데, 국내의 경우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적었다. 국내 등재유형별 의약품 분포 현황을 살펴보면, 전체 의약품 중 경제성평가 면제 의약품과 필수의약품 신약의 비중은 각각 11.6%, 3.6%에 그쳤다. 전체 약품비 중 해당 약제들의 지출 비중은 각각 0.6%, 0.3%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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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미국의 경우 의료비가 비싼 국가임에도 신약 접근성은 가장 높은 곳으로 꼽힌다. 미국제약협회(PhRMA)의 ‘글로벌 신약 접근성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신약 약품비 지출 비중은 47.9%에 이른다. A8 국가 중에서도 가장 높다. 새로운 의약품이 글로벌 시장에 출시된 이후 공공 의료보험 프로그램에 도입하는 속도도 가장 빠르다. 미국은 4개월, 독일은 11개월, 일본은 17개월이 걸리는 것으로 조사됐다. 2012년부터 2021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출시된 460개의 신약을 분석한 결과, 미국이 이들 신약 중 85%를 공공 의료보험 프로그램으로 도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출시된 신약의 대부분을 공공 의료보험을 통해 환자들에게 제공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독일은 61%, 일본이 48%로 뒤를 이었다.
리차드 부의장은 “미국은 공공 의료보험 프로그램 가입자들이 새로운 의약품에 대한 정부의 비용 연구를 기다릴 필요 없이 신속하게 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다”며 “독일과 일본 정부는 환자들이 신약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한 뒤 임상적 혜택 평가 및 가격 협상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국의 건강보험 시스템은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보편적인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면서도 “이러한 강점이 오히려 혁신적인 신약 도입을 가로막는 장애 요인이 되기도 한다”고 진단했다.
리차드 부의장은 한국의 제약바이오산업 성장을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신약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는 “지체되는 급여 적용으로 인해 글로벌 기업들이 한국 시장에 진입하지 않거나 철수하는 ‘코리아 패싱’ 사례가 늘고 있다”면서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을 ‘혁신을 저평가하는 국가’로 인식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신약의 급여화 가능성이 불확실한 시장으로 간주되면 제약바이오 산업에 대한 투자 유치는 더 어려워질 것”이라며 “신약 접근성 강화를 단순히 건강보험 예산 측면에서 바라볼 것이 아니라 환자들을 위해 의료 서비스를 개선하고, 나아가 한국의 투자·혁신 생태계를 육성하는 전략적 수단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국내 전문가 역시 정부가 신약이 사회에 미치는 여러 영향을 검토해 급여 기준에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영신 한국글로벌제약산업협회(KRPIA) 부회장은 “국내 의약품 시장은 신약 등재를 위한 제도적 진입 장벽이 높을 뿐 아니라, 등재 후에도 중복적인 사후관리제도가 이뤄지면서 약가가 지속적으로 낮아지는 구조”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국내외 제약사들이 연구개발에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투자하고 실패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며 “신약의 혁신적 가치가 보장되지 않아 한국이 신약 강국으로 가는 데 어려움이 많다”고 했다. 이 부회장은 “초고령, 저출산 시대에는 환자가 신약 치료를 통해 가정, 일터로 돌아감으로써 사회경제적으로 미치는 긍정적 영향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면서 “정부의 의지를 바탕으로 효과 좋은 신약들이 신속하게 환자들에게 닿을 수 있는 실질적인 정책과 제도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환자단체는 정부와 유관기관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코리아 패싱 같은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성주 한국중증질환연합회 회장은 “정부의 노력으로 신약 접근성이 과거보다 개선됐지만 신약 개발 속도에 비하면 급여 등의 지원이 여전히 뒤처지고 있다”며 “혁신적인 신약이 잇따라 등장하는 가운데 약값은 갈수록 비싸지고 환자들의 경제적 부담도 커져만 간다”고 지적했다. 김 회장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코리아 패싱은 환자의 치료 환경을 옥죄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며 “정부가 제약사, 환자단체와 협력해 장기적인 시각에서 신약 도입과 급여 적용에 대한 합의를 이뤄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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