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난 서울로”…벼랑 끝 지역의료 [의료 난맥①]

“소문난 서울로”…벼랑 끝 지역의료 [의료 난맥①]

기사승인 2025-03-10 06:05:04
의과대학 입학 정원 확대를 둘러싼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대치가 계속되는 사이 의료의 질은 떨어졌으며, 환자들은 응급실을 찾아 헤매고 암 수술을 미루는 등 피해가 쌓였다. 전공의가 병원을 이탈하면서 세계 최고의 시스템을 자부하던 한국 의료는 휘청였다. 의료현장에선 “터질 게 터졌다”는 탄식이 나온다. 이를 지켜보는 국민의 한숨이 깊어지는 가운데 지속가능성을 불어넣기 위해 짚어야 할 한국 의료의 민낯을 일곱 편에 걸쳐 전한다. [편집자주]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환자와 보호자들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다. 박효상 기자

# 강원 춘천에 사는 최경식(55·가명)씨는 수개월간 지속된 복통으로 인해 지난해 11월 동네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큰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라”고 권했다. 최씨는 “춘천에도 대학병원이 있지만 검사를 제대로 받으려면 서울로 가는 게 낫다는 지인들의 말을 듣고 서울 대형병원의 진료를 예약했다”고 말했다. 최씨는 서울의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았고 초기 담낭암 진단을 받았다. 최씨는 “진단이 늦어졌다면 병이 더 진행됐을 것”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대기 환자가 많아서 정작 치료는 두 달 뒤에나 가능했다. 

# 부산 강서구에 거주 중인 이민정(36·가명)씨는 다섯 살 딸아이의 심장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서울의 대형병원을 수소문했다. 이씨는 “의사의 명성과 치료 성과를 고려해 서울행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현재 이씨는 한 달에 두 번 딸의 진료가 잡힌 날이면 KTX를 타고 왕복 8시간을 이동하고 있다. 교통비, 숙박비 등에 따른 부담이 크지만 아이의 치료를 위해 감수하고 있다.

지역에 있는 병원을 뒤로 하고 서울을 찾는 환자가 줄을 잇는다. 서울 대형병원 선호 현상과 의료 자원의 불균형 등이 맞물리며 수도권 병원은 포화 상태에 이르고 지역의료는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의료기관의 기능을 구체화해 지역 내 중소·공공병원의 역할을 강화하고, 의료전달체계를 확립해 잘못된 의료 이용 관행을 고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제한적 의료전달체계…“1차 의료 기능 획기적 강화해야”

의료전달체계는 환자가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의료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시스템이다. 의료전달체계 안에서 의료기관은 종류(등급)에 따라 통상 1차, 2차, 3차 병원으로 나뉜다. 1차 병원은 병상 수 30개 미만의 동네 병·의원이 해당한다. 2차 병원은 전문병원과 30개 이상 병상을 가진 종합병원으로 일부 대학 부속병원이 포함돼 있다. 3차 병원은 희귀·중증질환 등 난도 높은 진료에 특화된 상급종합병원을 일컫는다. 현재 보건복지부가 지정한 국내 상급종합병원은 총 47곳이다.

전문가들은 효율적 의료전달체계의 모습으로 경증 환자는 동네 병·의원, 중등증(경증과 중증 사이) 환자는 종합병원, 중증 환자는 상급종합병원에서 진료받는 것을 그린다. 하지만 허리 역할을 하는 2차 병원의 기능이 약해 의료전달체계를 이루는 세 가지 축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2차 병원 진료를 건너뛴 채 지역 제한 없이 1차 병원에서 곧장 3차 병원 진료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경증으로 상급종합병원을 방문하는 환자는 매년 500만명을 넘어서는 실정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 2023년 경증질환 진료를 위해 대형병원을 찾은 환자는 549만6199명으로 집계됐다. 2021년엔 592만9308명, 2022년엔 517만9171명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위장염과 결장염으로 5년간 총 252만2210명의 환자가 대형병원을 방문했다. 이외에도 △상세불명의 원발성 고혈압 △식도염을 동반한 위식도역류병 △상세불명의 급성 기관지염 △합병증을 동반하지 않은 2형 당뇨병 등이 진료가 이뤄진 상위 10개 경증질환에 포함됐다.

2023년 서울 소재 의료기관 진료 환자 수. 그래픽=한지영 디자이너

지방에 사는 환자가 ‘서울 원정’에 나서는 사례도 꼬리를 물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23년 서울 소재 의료기관에서 진료받은 환자는 총 1520만3566명이다. 이 중 633만3594명(41.7%)이 서울이 아닌 다른 시·도 거주자였다. 서울에서 진료받은 환자 10명 중 4명이 타지에서 온 셈이다. 또 서울 병원에서 수술받은 사람은 모두 46만8637명으로, 이 가운데 20만7401명(44.3%)이 다른 지역 거주 환자였다.

원정 진료·수술이 잇따르는 건 의료기관·인력·자원의 서울 쏠림 현상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있는 탓이다. 2023년 기준 전국 의사의 28%, 요양기관의 24%가 서울에 몰려있다. 자기공명영상(MRI) 기기 1999대 중 478대(24%), 양전자 방출 단층촬영(PET) 장치 174대 중 61대(35%)가 서울에 있다.

나백주 을지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지역 의료의 허리 역할을 담당해야 할 2차 병원들이 문을 닫거나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교통 여건이 개선되고 지역 인구는 감소하다 보니 지방 병원들의 경쟁력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의료전달체계 확립을 위해선 환자가 퇴원 후 집 근처 병·의원에서 관리받도록 하는 등 1차 의료의 역할과 권한을 획기적으로 강화해야 한다”면서 “지역 주민이 지역 내 공공병원을 믿고 갈 수 있게 인력, 장비 등 지원을 더 많이 투입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지역 의료인력 이탈 가속…진료 여건 개선 필요”

신규 의료인력의 유입이 없는 상황에서 기존 인력이 이탈하는 현상도 지역 의료 활성화를 가로 막는다.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에 반대해 전공의들이 이탈한 이후 남은 의료진은 피로 누적을 호소하며 사직하고 있다. 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2~8월 수련병원 88곳에서 사직한 전문의는 부산 145명, 대구 134명, 인천 105명, 경남 87명, 광주 67명 등이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응급의료센터 안으로 의료진이 들어가고 있다. 곽경근 대기자

정부의 ‘전문의 중심’ 진료시스템 구축에 따라 수도권 대형병원들이 전문의 채용에 나서면서 인력 이탈은 가속화됐다. 정년퇴임한 교수를 고용하는 방식 등을 통해 인력난에 대응하던 중소병원들은 전문의 확보가 더 어렵게 됐다. 특히 지방 병원 교수들의 이탈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분위기다. 지역거점 국립대병원인 충북대병원의 경우 의정갈등 사태 이후 15명 넘는 교수들이 그만뒀다. 채희복 충북의대 교수 비상대책위원장은 “의료공백이 언제 해소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남아 있는 전문의들은 1년 동안 밤낮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며 “번아웃 상태가 벌어지면서 하나둘 그만두고 있다”고 토로했다.

조승연 전 인천의료원장은 수가 인상만으로는 인력 이탈을 막을 수 없다고 했다. 조 전 원장은 “급여가 아무리 높아도 낙후된 환경에서 일을 하다 보면 점점 뒤처지는 것 같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들면서 이직을 고민하게 된다”라며 “의료 인력이 수도권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지역거점 국립대병원과 공공병원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 최적의 진료 환경을 조성하고, 지역에서 근무할 의사를 집중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복지부는 지난 7일까지 ‘지역필수의사제 운영지원 시범사업’에 참여할 광역 지방자치단체 공모에 나섰다. 이번 시범사업은 의료개혁특별위원회 1차 실행방안으로 발표된 과제 중 하나로, 지역에서 근무하는 산부인과 등 필수의료 분야 의사에게 월 400만원의 근무 수당과 주거·교통 등 정주 여건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사업에 참여하는 필수과 의사는 계약 기간만큼 해당 지역에 거주하며 근무해야 한다. 계약을 위반할 경우 기존에 지원한 수당을 환수하는 등의 조치가 이뤄진다. 의무계약 근무 기간은 5년 내외가 될 전망이다. 권병기 복지부 필수의료지원관은 “지역의료 부족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지자체와 의료기관의 협력이 중요한 시점이다”라고 밝혔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신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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