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과대학 입학 정원 확대를 둘러싼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대치가 계속되는 사이 의료의 질은 떨어졌으며, 환자들은 응급실을 찾아 헤매고 암 수술을 미루는 등 피해가 쌓였다. 전공의가 병원을 이탈하면서 세계 최고의 시스템을 자부하던 한국 의료는 휘청였다. 의료현장에선 “터질 게 터졌다”는 탄식이 나온다. 이를 지켜보는 국민의 한숨이 깊어지는 가운데 지속가능성을 불어넣기 위해 짚어야 할 한국 의료의 민낯을 일곱 편에 걸쳐 전한다. [편집자주] |

진료과에 따라 인력, 수입 등에서 차이가 나는 의료계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고착화됐다. 소아청소년과, 흉부외과 등 필수의료과는 기피 현상이 심각한 반면 안과, 성형외과, 피부과 등 소위 ‘인기과’는 선호도가 높다. 전문가들은 수가 인상만으로는 진료과 양극화를 해소할 수 없다며 의료 현장을 둘러싼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짚는다.
인기과에 전공의가 쏠리는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박희승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보건복지부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8년 정원 100%를 채웠던 소아청소년과의 전공의 지원율은 2019년 이후 꾸준히 하락해 지난해 상반기 30.9%에 그쳤다. 같은 기간 가정의학과도 96.8%에서 53.6%로 지원 규모가 감소했다. 매년 전공의 정원의 90% 이상을 확보하던 산부인과 역시 지난해 상반기엔 70%를 가까스로 넘겼다.
이와 대조적으로 피부과, 안과, 성형외과의 인기는 굳건하다. 2015년부터 2024년 상반기까지 이들 진료과가 기록한 평균 전공의 확보율은 각각 99.9%, 99.3%, 99.6%에 달했다.
진료과 내에서도 ‘인기 파트’ 갈려
이같은 양극화 현상은 같은 진료과 안에서도 이어진다. 신경외과의 경우 척추 진료에 전문의가 몰리고 뇌졸중 등을 주로 보는 뇌 진료 파트는 외면받고 있다. 혈관이 막히거나(뇌경색) 터지면서(뇌출혈) 뇌 손상을 일으키는 질환인 뇌졸중은 골든타임이 있는 중증 질환이다. 혈액과 산소를 공급받지 못해 뇌세포가 괴사하면 살릴 방법이 없어 최대한 빠르게 치료하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뇌졸중 환자의 35%만 골든타임 안에 혈관 재개통 시술이 가능한 뇌졸중센터에 도착한다. 나머지는 치료 가능한 병원을 찾아다니다가 골든타임을 놓친다.
뇌졸중 환자가 적절한 치료를 받아 후유증을 줄이려면 병원마다 전문의가 배치돼야 하지만 현실은 이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전국 47개 상급종합병원조차 뇌졸중 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를 2~3명만 두는 곳이 대부분이다. 2022년 서울아산병원에선 뇌출혈로 쓰러진 30대 후반 간호사가 수술할 의사가 없어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숨진 사건이 있었다. 당시 이 병원에 수술이 가능한 의사는 2명뿐이었다.

대한뇌졸중학회에 따르면, 2023년 6월 기준 국내 뇌졸중 전문의 수는 436명으로 서울이 90명으로 가장 많고 인천과 강원, 제주는 각각 17명, 13명, 9명에 불과하다. 신경중재치료(혈관 내 시술)가 가능한 전문의는 전국에 56명이 있으며, 시술을 운영하는 병원은 41곳뿐이다. 뇌졸중을 치료하는 전문의의 인원 자체도 적은데 전문의가 되려는 전공의·전임의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2023년 뇌졸중 전임의(펠로우) 수는 전국 6개 병원의 12명이 전부다.
김대중 아주대병원 내분비대사내과 교수는 “우리 병원의 뇌경색, 뇌출혈 환자를 보는 신경과 교수들도 전공의 이탈 후 줄곧 응급 당직을 서고 있는데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고 토로한다”면서 “응급실에 응급의학과 교수가 있어봤자 배후진료가 받쳐주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했다.
내과도 상황은 비슷하다. 내과는 주요 질환별로 소화기내과, 순환기내과, 호흡기내과, 내분비대사내과 등으로 진료 분야가 나뉜다. 이 중 급성심근경색이나 협심증, 부정맥 등 심혈관질환을 주로 치료하는 순환기내과(심장내과)는 초응급 환자를 보기 때문에 내과 안에서도 기피 전공으로 꼽힌다. 서울의 대형병원도 순환기내과 의사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서울 ‘빅5 병원’ 중 한 곳인 서울성모병원은 순환기내과 의사가 부족해 최근까지 야간과 휴일 심혈관계 응급 환자 진료를 중단한 바 있다.
비급여·실손보험 팽창…“수가 인상만으론 해결 안 돼”
의료계에선 원가 이하의 건강보험 수가를 받는 시스템이 필수의료 기피 현상을 부추겼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윤 민주당 의원이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받은 ‘2022년 진료과목 간 급여진료 비용과 수익 자료’에 따르면, 외과계 급여진료 비용은 1조1429억원이지만, 수익은 9561억원으로 원가보전율이 84%에 그친다. 필수의료 분야의 원가보전율을 보면 내과가 72%, 외과 84%, 소아청소년과 79% 등으로 모두 100%에 미치지 못했다. 산부인과의 원가보전율은 61%로 방사선종양학과(252%)의 4분의 1도 안 됐다.

비급여진료에 대한 실손보험 보장은 의료비 증가로 연결되고, 비급여 항목이 많은 진료과로 의사가 집중되면서 필수의료가 약화되는 부작용이 생겼다. 건보공단의 ‘2024년 상반기 비급여 보고자료 분석 결과’에 따르면, 2023년 3월분 1068개 비급여 보고항목의 진료비 규모는 총 1조8869억원이다. 의과 분야에서 진료비 규모가 가장 큰 분야는 도수치료로 1208억원을 기록했다. 근골격계 질환 체외충격파치료 진료비는 700억원으로 집계됐다.
도수치료, 체외충격파치료 등은 대표적 비급여진료에 속한다. 강민국 국민의힘 의원실이 손해보험협회로부터 받은 ‘비급여 물리치료 지급 세부 현황’을 보면, 지난 2021년부터 2024년 8월까지 비급여 물리치료로 지급된 실손보험금은 약 7조4000억원에 달했다. 도수치료로만 4조원, 체외충격파치료로 1조원 이상의 보험금이 지급됐다.
비급여·실손보험 팽창에 따라 정부는 지난 1월 중증·희귀질환 등 꼭 필요한 치료를 건강보험 급여로 전환하고, 남용 우려가 큰 비급여 항목은 관리급여로 설정하는 방안을 발표한 바 있다. 관리급여란 치료 효과가 불확실한 진료 등에 대해 임상 효과가 검증될 때까지 임시로 건강보험을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인 관리급여엔 환자부담률이 최대 90%까지 적용된다.
건강보험 수가도 단계적으로 조정된다. 현재 종합병원 이상 의료기관에서 주로 하는 수술, 처치 행위 중 3000여개는 보상이 적은 것으로 정부는 파악하고 있다. 이에 저평가된 의료행위는 원가 수준으로 인상하는 수가 전면 조정안을 마련하고, 2027년까지 공정한 보상체계안을 완성할 방침이다. 또 연간 5000억원의 건강보험 재정을 투입해 두경부암, 소화기암 등 생명과 직결된 중증 수술 1000여개와 마취 등 필수의료 행위의 수가를 대폭 인상하기로 했다.
전문가들은 궁극적으로 필수의료 기피 현상의 원인을 진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백주 을지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그동안 보건의료 공급체계의 안정성을 높이고 공공의료를 강화하는 노력은 방기한 채 수가만 올리는 방식으로 필수의료 문제에 대응해왔다”라며 “의사들이 생명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필수의료 분야를 왜 기피하는지 정확한 원인을 파악해 관련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돈 잘 버는 분야라고 해서 제약하는 것은 근본적 해결방안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대한의사협회 정책이사를 지낸 이은혜 순천향대부천병원 영상의학과 교수는 환자가 적어서 유지가 안 되는 진료과나 지역은 별도의 지원금 지급이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이 교수는 “수가만으로는 유지가 안 되는 지역·취약 의료는 지원금이 있어야 한다”며 “환자의뢰체계도 재도입해서 의료 이용을 관리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어 “의사의 의학적 판단과 상관없이 환자가 하고 싶은 대로 진료받기를 원한다면 본인부담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