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호계의 오랜 숙원인 ‘간호법’이 본격적으로 시행에 들어갔지만, 진료지원(PA) 간호사의 업무 범위를 둘러싼 하위법령이 아직 마련되지 않아 의료 현장의 혼선이 이어지고 있다. 간호계는 PA 간호사의 업무 범위와 교육 체계를 명확히 규정한 하위법령을 시급히 제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23일 의료계에 따르면 간호법이 지난 21일부터 시행에 돌입했다. 지난해 8월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한 이 법은 간호사의 전문성과 근무환경을 법적으로 보호하고, 간호 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법안 통과 당시 핵심 쟁점이었던 PA 간호사(또는 전담 간호사)의 업무 범위는 여전히 모호하다. 정부가 하위법령인 ‘간호사 진료지원 업무 수행에 관한 규칙’의 발표를 하반기로 미룬 데 따른 결과다.
현재 의료 현장에서는 PA 간호사들이 여전히 명확한 업무 범위나 법적 보호 없이 의사의 업무 일부를 수행하고 있다. 지난해 2월 의정 갈등 여파로 전공의 수급이 어려워지면서, 상급종합병원을 중심으로 PA 간호사 채용이 늘고 전공의 업무를 대신 수행하는 사례도 증가하고 있다. 일부 의료기관에서는 동맥 카테터 삽입술, 복수천자 등 침습적 시술까지 이뤄지고 있다.
경기 지역의 한 대형병원에서 PA로 3년째 근무 중인 간호사 A씨는 “전공의에 준하는 수준의 업무를 맡고 있지만, 업무에 대한 법적 보호 장치가 불분명해 불안감이 크다”며 “복수천자나 기관삽관 같은 침습적 행위를 할 때마다 의료사고가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갖는다”고 언급했다. 이어 “아직 PA 제도는 정부 시범사업 단계에 머물러 있고, 이를 뒷받침할 하위법령이 갖춰지지 않아 병원마다 자격 기준과 업무 범위를 자율적으로 설정하고 있다”며 “결국 기준 없이 충분한 교육을 받지 않은 간호사들까지 PA 역할을 맡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소병원은 상황이 더욱 열악하다. 일부 병원은 PA 간호사 채용 공고에서 ‘경력 무관’ 또는 ‘1년 이상’이라고만 명시하고 있다. 임상 경험이 적은 간호사에게도 의사 업무를 맡기는 실정이다. 최근 한 중소병원에 지원했던 간호사 B씨는 “신규 간호사임에도 PA 업무를 권유받아 거절했다”며 “간호법이 시행됐다고 해도 당장 보호받을 수 있는 장치가 없고 의료 사고에 대한 책임이 모호한 현실이 걱정됐다”고 말했다.
PA 간호사는 의사의 진료와 처치, 수술, 검사 등을 지원하는 인력을 일컫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법적 지위가 없는 비공식적 역할이지만, 현장에서는 의사 부족을 보완하는 실질적 인력으로 오랜 기간 관행적으로 운영돼 왔다. PA 간호사는 지난해 3월 1만1388명에서 올해 2월 1만7560명으로 증가했다. 이에 정부는 간호법 시행을 계기로 PA 간호사의 역할을 제도화하고 구체적인 업무 범위를 명시하겠다는 방침이다. 이를 위해 보건복지부는 지난달 공청회를 열고 ‘간호사 진료지원 업무 수행 규칙 방안’을 발표했다.
해당 방안에 따르면 기존 시범사업에서 허용했던 54개 의료행위는 45개로 조정됐으며, 일부는 통합하고 일부는 제외하거나 신규로 추가했다. 업무 범위에는 배액관 삽입·교체·제거, 수술 부위 드레싱, 기관절개관 제거, 골수천자, 복수천자, 분만 중 내진 등 기존에 의료계가 난색을 표한 항목들이 포함됐다. 이 규칙안에서는 업무 수행 자격 요건도 제시됐다. 간호법상 자격을 갖춘 전문 간호사 또는 임상 경력 3년 이상으로 관련 교육을 이수한 간호사는 PA 업무를 맡을 수 있으며, 시행일 기준 1년 이상 해당 업무를 수행한 경우에는 경력이 3년 미만이더라도 일정 교육을 거쳐 업무 수행이 가능하다.
그러나 직역 간 이견이 좁혀지지 않으면서 제도화는 난항을 겪고 있다. 의료계는 PA 간호사에게 고난이도 의료행위를 허용할 경우, 의사와 간호사 간 역할 구분이 모호해지고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임상 현장의 간호사들도 확대된 업무 범위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있다.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의 ‘2025년 보건의료노동자 정기 실태조사’에 따르면 간호사 10명 중 9명은 절개, 배농, 중심정맥 카테터 삽입, 조영제 투여, 복수·골수천자 등의 행위를 PA 간호사의 업무에 포함하는 것은 과도하다고 응답했다.
교육과 자격 부여의 주체를 두고도 갈등이 크다. 대한간호협회는 PA 자격을 단순 교육 이수증이 아닌 ‘자격증’ 형태로 부여하고, 교육기관 지정과 자격 평가를 간호계가 총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문 간호사 단체는 전담 간호사 제도를 석사급 교육과 국가 자격시험을 통과한 전문 간호사 체계 안에 통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부는 제도화 초기에는 우선 업무 범위를 명확히 하는 데 집중하고 자격증 발급 등은 추후 논의할 예정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업무 범위와 역할 배분을 둘러싼 논란은 하위법령 제정과 함께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며 “교육과 수련 체계화에 대한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나가겠다”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