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사회] 지난 18일 오후 6시 서울 지하철 1호선 종각역 종로타워 앞. 탁구대 하나를 둘러싸고 시민 200여명이 모였다. 양복 차림의 두 남자는 진지한 표정으로 서브를 넣고 백핸드로 받아쳤다. 경기장 한켠에서는 마이크를 든 50대 남성이 경기를 생중계했다.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시민들은 점수판을 넘기며 심판을 봤다.
누구나 무료로 참여할 수 있는 길거리 탁구장의 모습이다. 길거리 탁구대회는 올해로 꼭 10년째다. 매년 이 대회를 열고 있는 최진구(50·사진 오른쪽 마이크 앞)씨는 탁구선수도, 탁구협회 관계자도 아니다. 그저 탁구가 좋아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일인데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최씨가 탁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건강 때문. 방송국 음악프로그램 작가였던 그는 연일 이어지는 과로와 과음에 키가 170㎝인데도 몸무게는 86㎏까지 나갔다. 건강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에 탁구장을 찾았고 1년만에 몸무게를 14㎏이나 줄였다.
탁구의 매력에 빠진 최씨는 1999년 10월21일 탁구대와 마이크 하나만 들고 무작정 종로3가 젊음의 거리(현 피아노거리)로 나갔다. 탁구장 사장님의 딸이자 지금은 아내가 된 김광옥(50)씨도 함께였다.
최씨가 내세우는 길거리 탁구 경기의 원칙은 철저하게 ‘약자에게 유리한 경기’다. 라켓을 처음 잡아보는 초보선수나 고령의 어르신, 여자선수가 경기에 참가하면 기본으로 5∼10점은 주고 시작한다. 점수를 밑지고 시작하는 쪽이나 거저 얻은 쪽 모두 유쾌하게 경기에 임할 수 있는 것은 최씨의 재치있는 입담 덕분.
여자선수가 경기에 나서자 최씨는 공개적으로 상대선수에게 “몇 점 주고 시작하시겠습니까. 본인의 인간성에 따라 주시면 됩니다”라고 말문을 연다. 외국인이 참여하면 A매치(국가대표 선수간에 이뤄지는 경기)가 열리고 있다며 너스레를 떤다.
점수차가 심하게 벌어진다 싶으면 어김 없이 ‘도구 선물의 시간’이 이어진다. 지고 있는 사람이 상대에게 라켓 대신 사용할 도구를 골라주는 것. 밥주걱, 슬리퍼, 나무 도마, 냄비 받침대 등 종류도 다양하다. 슬리퍼를 들고 연신 헛스윙을 날리는 선수 때문에 관중석에선 한바탕 웃음이 인다.
최씨의 꿈은 제2의 탁구 전성기를 여는 것이다. 최씨는 “73년 사라예보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여자대표팀이 국내 구기 종목 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땄을 때 탁구장이 곳곳에서 눈에 띌 정도로 인기였다. 온국민이 탁구와 함께 건강해지는 그날까지 길거리 경기는 계속된다”며 웃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권지혜 기자,사진= 최진구씨 제공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