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前대통령 서거] 애증의 3김… 때론 적으로 때론 동지로… 골곡의 정치 상징

[김前대통령 서거] 애증의 3김… 때론 적으로 때론 동지로… 골곡의 정치 상징

기사승인 2009-08-18 16:14:01
[쿠키 정치]
김대중(DJ) 김영삼(YS) 김종필(JP). 세 사람을 통칭한 ‘3김’이라는 단어는 오랜 시간 한국 정치의 성취와 굴곡을 상징하는 대명사였다. 트로이카를 형성해 온 이들 정치거목은 적과 동지 사이를 드라마틱하게 오가며 파란만장한 현대 정치사의 파노라마를 이끌어왔다. 이제 DJ의 죽음으로 3김 시대는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막을 내렸고 객석에는 두 김씨만 쓸쓸히 남았다.

DJ와 YS

두 사람의 운명적 애증 관계는 3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3선 개헌 다음해인 1970년 9월 DJ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YS를 극적으로 물리치고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 자신만만했던 YS가 뜻밖의 패배에 큰 충격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대의에 헌신하면서 상당 기간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다. 박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80년 초 사면복권된 DJ와 YS는 '서울의 봄' 시기에 나란히 정치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이들이 창당한 신한민주당은 12대 총선을 통해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공동의장을 맡은 두 사람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투쟁과 87년 6월 민주항쟁을 함께 주도했다.

하지만 이 협력관계는 8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결정적인 파국을 맞았다. 집권당인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를 상대로 한 선거전에서 야당 후보가 승리할 가능성은 희박했으나 각자 아전인수식 승산을 근거로 독자출마를 강행한 결과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이로써 정권교체를 열망했던 많은 국민들은 민주개혁세력의 분열을 초래한 두 사람을 향해 엄청난 질책을 가했고,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불신도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에 YS가 90년 민정당, 신민주공화당과 함께 3당 합당을 전격적으로 감행하자 철저하게 고립된 DJ는 YS를 강력 비난하기에 이른다. 이어 92년 대선에서 YS에게 190만여 표차이로 무릎을 꿇은 DJ는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정계은퇴 선언까지 해야 했다. 재기에 나선 DJ는 97년 대선에서 국민회의 후보로 다시 출마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 승리, YS에게 간접적으로 복수를 한 셈이 됐다. 국민의 정부 시절에 YS는 현직 대통령인 DJ를 향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맹렬한 증오심을 표출했다. 여기에는 YS 차남 현철씨 구속문제를 DJ가 해결해주지 않은 데 따른 분노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6월까지도 ‘요설’‘공산주의자’ 등의 거친 표현으로 DJ를 규탄했던 YS는 며칠 전 이승과의 작별을 눈앞에 둔 DJ의 병실을 전격 방문함으로써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화해를 이뤘다.

DJ와 JP

DJ에게 JP는 정계 입문 초기부터 온갖 시련을 안겨준 존재였다. DJ가 삼수 끝에 61년 국회의원에 당선됐다가 불과 3일 만에 당선 무효가 된 것은 JP가 주축이었던 5·16 군사쿠데타 때문이었다. 10월 유신에 따른 해외 망명, 일본 도쿄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돼 죽음의 문턱까지 밞았던 사건 등이 모두 JP가 2인자로 참여했던 박정희 정권 때 발생한 일이다. JP가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해 대선과 총선에 나서고, 급기야 3당 합당으로 YS와 손을 잡은 것도 DJ에게는 모두 타격이었다.

그러나 JP는 종국에 가서는 DJ가 대통령이 되는 데 일등공신이 됨으로써 정치판에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음을 새삼 확인시켰다. YS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JP는 집권 상도동 세력의 압박에 반발해 95년 자민련을 창당했다. 96년 자민련의 총선 선전으로 YS측에 큰 후회감을 안겨줬던 JP는 우여곡절 끝에 DJ가 건넨 손을 잡아 9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DJP 연합을 결성했다. 충청 지역의 맹주이자 ‘유신 본당’으로 보수층에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던 JP의 기여가 DJ 당선에 결정적 요인이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DJP 연합은 DJ 취임 직후부터 순탄치 않았다. 98년 2월25일 한나라당의 극력 저지로 JP 총리 인준동의안은 부결됐고, 2000년 초에는 자민련을 원내교섭단체로 만들기 위해 민주당에서 ‘의원 꿔주기’라는 희대의 편법을 강행해 여론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 본질적인 문제는 이념지향이 크게 다른 동거 정부의 구성이 국정운영의 불안정성을 상시적으로 내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결국 인연은 돌고 돌아 2000년 10월 임동원 국정원장의 경질을 제기한 JP 요구를 DJ가 뿌리치면서 DJP 연합도 와해되고 말았다.

공동정권에 종언을 고한 JP는 자력으로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해보려 했지만 16대 총선에서 대패함으로써 ‘부도옹’의 명성을 뒤로 한 채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JP는 2004년 정계은퇴를 선언했고, 최장수 정당으로 명맥을 유지하던 자민련은 2006년 3월 공식 해체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호경 기자
hkkim@kmib.co.kr
신은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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