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가 남북문제와 인연을 맺은 것은 해방정국 때 몽양 여운형이 좌·우익을 망라해 구성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면서부터. 이후 남로당 간부와의 비밀자금 거래와 관련돼 투옥되기도 했으나 나중에 단순한 대부관계로 드러나 용공혐의가 벗겨지기도 했다. 오히려 6·25전쟁 직후 북한군에 잡혀가 우익반동이라는 이유로 투옥됐다 총살직전 탈옥하기도 했다.
정치 입문 이후 ‘빨갱이’로 몰려 수차례 고초를 겪었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색깔론과 사상논쟁에 휩싸였지만 DJ는 대북 포용 정책의 확고한 신념을 꺾지 않았다. DJ의 통일정책은 1970년대 야당지도자 때부터 주장해온 ‘남북연합→연방제→통일국가’를 골자로 하는 3단계 통일론으로 압축된다. 그의 통일론은 대통령에 취임한 98년 이후 햇볕정책을 과감하게 실천하고 남북 화해협력 시대를 열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통일과 관련한 주옥 같은 어록도 남겼다. 92년 대선운동 과정에서는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며, 통일에의 희망이 무지개처럼 피어오르는…”이라는 표현으로 표심을 자극했다. 2000년 6월 평양 도착성명에서는 “여러분이 보고싶어 이곳에 왔다”며 통일에 관한 끝없는 염원을 드러냈다. 하지만 퇴임 후 제1차 남북정상회담 직전 북측에 돈을 건넨 사실이 밝혀진 데 이어 2006년 북한의 핵실험이 뒤따르면서 그의 햇볕정책과 통일론은 빛이 바랬다.
DJ는 지역주의 타파에 관한 강한 열망도 드러냈다. 97년 11월 부산일보 대선후보 초청강연회에서 그는 “신한국당 최고지도자가 ‘우리가 남이가’라고 하는데 여러분도 나를 남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도 김해 김씨로 경상도 사람이다. 나의 두 며느리도 부산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98년 6월 인촌강좌 특강에서는 “지역주의는 반드시 없애야 한다. 대통령을 못하면 못했지 절대로 동서분단을 방치할 수 없다”고 연설했다. 또 다른 연설에선 “남북으로 갈라진 것도 모자라 동서로 갈라지고, 계층간에 대립하고, 세대간에 갈등해서는 우리의 미래는 없다”고 강조했다. DJ 뒤를 이어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지역주의 극복에 정치 인생을 걸었다. 하지만 번번히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의 지역주의 편승 시도는 계속됐다. 지역주의 타파는 여전히 미완의 숙제로 남아 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한장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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