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사회] 맞벌이 회사원 허모(42)씨 부부는 3년 전 외동딸을 무참하게 잃었다. 2006년 2월17일 서울 용문동 비디오 대여점에 다녀온다던 딸 미연(당시 11세)양은 다음날 경기도 포천의 한 논바닥에서 숯덩이로 발견됐다. 인근 신발가게 주인이 꾀어 성폭행하려다 뜻대로 되지 않자 죽이고 시신을 불태운 것이다.
허씨 부부는 한없이 북받치는 슬픔 속에서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슬픔이 분노로 변하지 않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리고 남을 돕기 시작했다. 그것만이 고통을 이겨낼 방법이라고 믿었다.
아름다운재단은 17일 '용산 초등생 피살 사건'의 피해자 부모인 허씨 부부가 3년째 수천만원을 기부해 온 사실을 전했다. 부부가 신분 노출을 꺼린 탓에 뒤늦게 알려졌다. 부부는 자신들과 비슷한 일을 당한 범죄 피해자 가족을 돕는 데 써 달라며 매년 1000만∼1500만원씩 건넸다.
허씨 부부가 재단을 찾은 건 딸을 잃은 지 11개월 만인 2007년 1월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꼭 기부를 해야 할 이유가 있다. 강력 범죄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돕도록 해 달라"고 했다. 이들이 미연양의 부모라는 사실은 나중에야 밝혀졌다.
사연을 털어놓은 부부는 "아이를 잃고 너무 힘들었다. 미연이가 기부를 잘 했는데 범죄자에게 가족을 잃은 우리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우며 딸을 추억하고 싶다"고 말했다. 미연이는 생전에 부모 구두를 닦아 받은 돈을 저금통에 모았다가 연말에 불우이웃 돕기 성금으로 냈다고 부부는 회상했다.
허씨 부부는 10년간 매년 1000만원씩 모두 1억을 기부키로 했다. 지난해와 올해는 약속보다 500만원씩 더 냈다. 이 돈으로 '미연이의 수호천사기금'이 꾸려졌다. 허씨 부부가 낸 4000만원을 포함해 2007년 3월부터 현재까지 4688만8415원이 모금됐다. 18개 가정에 약 200만원씩 전해졌다.
연쇄 살인범 유영철과 정남규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도 도움을 받았다. 허씨 부부는 이들에게 일일이 엽서를 보냈다. '소중한 딸 아이를 잃었습니다. 슬픔이 분노가 되지 않도록 작은 실천을 해 봅니다. 저희 도움이 잠시나마 격려가 되면 좋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숨진 딸을 떠올릴 때마다 괴로워하던 부부는 이제 딸 사진을 보여주며 좋아하던 음식을 이야기할 정도로 상처를 회복했다. 재단 관계자는 "사무실로 찾아와 돈을 받아달라던 순간이 아직 또렷하다. 미연이 부모가 시작한 일이 다른 피해자 가족에게 큰 도움과 위로가 되고 있다"고 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강창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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