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난민이 됐나… 16년간 고국땅 밟지못한 미얀마인

나는 왜 난민이 됐나… 16년간 고국땅 밟지못한 미얀마인

기사승인 2010-07-30 17:59:01
[쿠키 사회] “선생님은 왜 난민이 됐나요?” 지난 28일 밤 경기도 부천에서 만난 내툰나잉(41)씨에게 물었다. 그는 1994년 여름 모국 미얀마를 떠나왔다. 서울에 도착한 그날은 무더웠다고 그는 회고했다. 그후 꼬박 16년 동안 고국땅을 밟지 못했다.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은 지는 7년이 넘었다. 그는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처지다.

◇모국에서=내툰나잉씨는 69년 9월 미얀마(당시 버마) 힌타다에서 태어났다. 힌타다는 미얀마 중앙을 가로지르는 이라와디 강 연안 도시다. 다정다감한 부모 아래서 세 살 터울의 누나와 함께 자랐다. 군부가 통제하는 미얀마에는 부조리가 판쳤다. 무고한 사람이 잡혀갔다. 돈을 주면 죄를 짓고도 풀려났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법은 멀었다. 그들을 돕는 변호사가 되고 싶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86년 12월, 당시 수도 양곤의 양곤대학교에 입학했다. 법대에 지원하려 했으나 1점이 모자라 심리학과로 방향을 틀었다. 대학 기숙사 같은 방 선배는 누나의 친구였다. 매일 밤 그는 미얀마 정치 상황을 설명했다. ‘지금처럼 정당이 여당밖에 없으면 국민 의견이 정책에 반영될 수 없다. 한국 같은 민주화가 절실하다’는 이야기였다.

◇학생운동=87년 9월 5일, 처음 시위에 참가했다. 정부가 돌연 화폐 단위를 바꾼 날이었다. 집에서 보내준 돈이 하루아침에 종잇조각이 됐다. 정부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성난 시민들과 함께 거리로 나갔다. 군인들이 들이닥쳤지만 두려움은 잠시였다. 독재에 대한 분노가 더 컸다. 이듬해까지 잇단 시위에 동참했다. 정부는 88년 3월 시위 진원지인 모든 대학교를 폐쇄했다.

그해 8월 8일, 전국에서 시위가 다시 벌어졌다. 계엄령이 떨어졌다. 무차별 진압으로 사상자가 속출했다. 시위대는 경찰서를 습격했다. 빼앗은 무기로 맞섰다.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도시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그는 헌병에게 붙잡혀 10여명과 한 방에 수감됐다. 아버지뻘 되는 사람들이 등을 두드리며 “민주주의를 위해 한 일이니 괜찮다”고 위로했다. 평화적으로 시위한 점이 참작돼 모두 3개월 만에 풀려났다.

◇한국으로=90년 9월 27일, 미얀마 사상 첫 총선이 치러졌다.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야당 민족민주동맹(NLD)이 82%의 지지율로 이겼다. 다른 학생들과 함께 수치 여사를 도왔었다. 수치 여사는 40년대 버마 독립을 주도한 아웅산 장군의 딸이었다. 그러나 군부는 선거를 무효화했다.

2년 만에 돌아간 학교는 이전과 달랐다. 친구가 사라진 교정에 낯선 사람이 늘었다. 비밀경찰이었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다.

93년 8월 졸업했다. 한국이 떠올랐다. 미얀마와 같은 군부 독재를 경험한 한국이 어떻게 민주주의 국가로 바뀌었는지 궁금했다. 노동부 공무원이던 학교 선배가 산업연수생 비자를 내주겠다고 했다. 한국행을 준비하는 동안 비밀경찰이 찾아왔다. 어깨를 치더니 “우리가 피곤하지 않게 다신 돌아오지 마라”고 했다.

◇한국에서=94년 6월 22일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더웠다. 수원의 가전제품 공장에서 텔레비전 외형을 만들었다. 주야간을 번갈아가며 하루 평균 12시간 일했다. 공장일은 난생 처음이었다. 월 60만원씩 받아 5만~10만원을 집으로 보냈다. 객지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뜻이었다.

한국 생활에 익숙해질 때쯤 미얀마인들을 모아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회원들은 현지 지인들을 통해 서로의 신분을 확인했다. NLD 한국지부를 조직하고 본부의 허가를 받았다.

97년 6월 말 불법 체류자가 됐다. 산업연수생 비자는 3년 기한이었다. 경기도 일대 공장을 전전했다. 간혹 월급을 떼였다. 항의하지 못했다. 단속에 대비해 가방에 늘 옷가지를 넣어 다녔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미얀마로 이송되면 모두 물거품이었다. 갇혀도 한국에서 갇히는 게 차라리 나았다.

◇난민으로=미얀미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는 한국 시민단체들이 난민 신청을 제안했다. 정중히 거절했다. 미얀마를 버리려고 한국에 온 게 아니었다. 얼마 후 단속에 걸린 NLD 회원 한 명이 미얀마로 송환됐다. 결국 2000년 5월 난민 신청을 해 2003년 1월 난민으로 인정받았다.

지난 1월, 미얀마 민주화 관련 대회에 참석하러 노르웨이로 가는 길이었다. 잇달아 전화가 걸려왔다. 미얀마에서 아버지와 친구들이, 미국에서 누나가 전화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미얀마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다. 미얀마 경찰들이 집 근처에 잠복하며 감시하고 있다고 현지 친구들이 전했다. 아버지 혼자 어머니 장례식을 치렀다.

내툰나잉씨는 지난 3월 NLD 한국지부 회장으로 선출됐다. 한국에 미얀마 정치 상황을 알리고 현지 동료들에게 활동비를 보내주고 있다. 그에게 한국의 보수·진보 충돌에 대해 물었다. “서로 다른 의견으로 다툴 수 있을 만큼 민주주의가 정착했다는 뜻이잖아요. 그런 문화가 오히려 부럽습니다.” 부천=국민일보 쿠키뉴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
강창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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