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연예] SBS 수목극 ‘싸인’은 박신양의 의한 박신양을 위한 드라마였다. 숱한 연구와 철저한 분석을 바탕으로 천재법의학자 ‘윤지훈’이 그의 몸에 빙의됐다. 몸짓 하나, 손짓 하나가 허투루 연기된 게 없을 정도로 깔끔하고 안정된 연기였다. 3년이라는 공백을 연기라는 비수로 내리치기라도 하듯 명연기의 진수를 과감하게 발휘했다는 호평이 잇따르고 있다.
‘싸인’은 출세와 권력, 진실과 정의의 반대편에서 대립하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드라마다. 사실 ‘싸인’이 꾸준히 승승장구했던 것은 아니다. 초반 이후 경쟁드라마 MBC ‘마이 프린세스’에 밀려 다소 주춤했다. 명작의 마력은 시청자를 다시 끌어당기기에 충분했다. ‘싸인’의 인기 비결은 일관된 스토리 전개와 탄탄한 구성,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 배우들의 열연으로 압축될 수 있다. 영화 <박봉곤 가출사건> <귀신이 산다> 각본을 집필하고 <라이터를 켜라> 연출을 맡은 장항준 감독과 그의 아내이자 작가인 김은희가 집필을 맡아 탄탄한 작품을 완성해갔다. 범죄수사물이다 보니 치열하게 각본 작업을 해야 했다. 하나하나 고심하던 김 작가가 결국 촬영 속도를 못 쫓아갔고, 장 감독이 연출가에서 공동작가로 포지션을 바꿔 아내를 도왔다. 이후 둘의 합작은 빛을 발하며 마지막 회까지 극의 팽팽한 호흡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배우들의 명연기도 볼거리였다. 국과수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권력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이명한’ 역의 전광렬부터 다혈질에 덤벙대는 신참내기 ‘고다경’ 역으로 열연한 김아중, 진실과 권력 사이에서 갈등하는 ‘정우진’ 역의 엄지원, 물불을 가리지 않은 수사력을 보여준 ‘최이한’ 역의 정겨운까지 제각각 빛났다. 출연진에서 ‘왕중의 왕’으로 돋보인 연기를 보여준 이가 박신양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박신양은 왕성한 호기심을 가진 모험가 스타일의 배우다. 드라마 ‘쩐의 전쟁’ ‘바람의 화원’ ‘싸인’으로 이어지는 차기작 선택의 면면을 놓고 봐도 알 수 있다. 남들이 흔히 하는 연기보다는 남들과 차별화되는 연기를 선호했고, 한 때 유행하는 내용이 아닌 독특하면서도 신선한 것을 지향했다. 그렇게 200여 편의 시나리오 가운데 진주처럼 발견했다는 ‘싸인’. 그는 죽은 사람의 마지막 울림과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국과수’의 필사 노력에 강한 끌림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윤지훈’ 역을 소화하기 위해 직접 시체를 찾아다녔다. 대본을 보고 대충 캐릭터를 만드는 일부 배우와 달리 손끝까지 혼연일체 되고 싶은 간절한 바람을 담아 부검실을 방문했다는 후문이다. 또한 천재법의학자가 시체를 무서워하거나 꺼려한다는 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시체를 매섭게 바라보고, 매끄럽게 절단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기에 첫 촬영 전까지 몇 개월 동안 시체 보는 일에 집중했다는 후문이다. 잠을 자려고 누우면 시체가 눈 앞에 아른거릴 만큼 패닉 상태에 빠졌다고 고백했을 정도다. 그의 치밀한 준비성에 동료배우들도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출연료 욕심을 버렸다는 것도 눈길을 끈다. 지난 2007년 히트를 기록한 SBS 드라마 ‘쩐의 전쟁’ 번외편 촬영 당시 회당 1억 원이 넘는 고액의 출연료를 챙기려고 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대중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박신양의 연기력은 국내에서 손꼽힐 정도이지만 주연배우들의 높은 몸값으로 인해 제작사가 이중 피해를 입는다는 점에서는 볼 때 다소 아쉬운 선택이었다는 게 대중의 의견이었다. 결국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로부터 무기한 출연 금지 처분을 받아 본의 아니게 공백기를 갖게 됐다. 이후 ‘고액 출연료’ 이미지가 꾸준히 따라다니면서 그를 괴롭혔다. 이 사건을 통한 성숙의 시간이 갖게 된 것일까.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가 내부에서 지정한 출연료 상한제를 지켰다. A급 배우에 해당하는 회당 1500만원을 받기로 합의하면서 출연료에 관한 모든 내용을 제작사에 위임했다. ‘싸인’이라는 작품 자체에 매료된 게 가장 큰 이유일 터다.
물론 1500만원도 적은 금액은 아니다. 하지만 몇 달 동안 시체를 찾아다니고 작품에 몰입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정신적·물리적 고통이 컸다는 점을 감안할 때 상대적으로 적게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번외편 1억 원을 챙긴 ‘쩐의 전쟁’과 비교하면 적은 금액인 것은 확실하다며 방송 관계자들이 입을 모았다.
연쇄살인마 ‘강서연’(황선희)에 의해 죽음을 맞은 ‘윤지훈’. 박신양은 첫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정의를 위해 싸우다가 자신이 마지막 ‘싸인’이 돼 생을 마감한다는 내용을 듣고 촬영에 임했다. 캐릭터에 대한 파악이 정확히 되다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일관된 연기력으로 극의 몰입을 높였다. 마지막 회까지 혼신을 다해 달린 박신양이 시청자에게 남긴 ‘싸인’은 ‘열정’이 아니었을까.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은주 기자 kime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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