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연예] 에니악(eniac). 세계 최초의 전자식 컴퓨터로 인정되고 있는 기계로 1943~1946년에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모클리(J. Mauchly)와 에커트(J.P. Eckert, Jr.)가 만들었다. 1만 8000여 개의 진공관으로 이루어졌으며 무게가 30t, 크기는 가로 9m 세로 15m의 방을 가득 채운 것이었다. 지난 1955년까지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워싱턴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 유물이 되어버린 에니악이 홍대 인디신에 등장했다. 30t의 무게감을 버리고 봄기운 가득한 가볍고 편안한 음악을 들고 말이다. 지난 4월 EP앨범 ‘소년은 달린다’를 내고 활동하고 있는 에니악(본명 김진환)이 그 주인공이다.
일렉트로닉 뮤지션들이 들려주는 전자음보다는 진공관에서 울리는 아날로그 느낌이 좋아서 이름으로 삼았다는 에니악. 지난 3일 서울 홍대 클럽 에반스에서 만난 그는 음악 곳곳에서 뿐 아니라 사람을 살갑게 대하는 모습에서도 아날로그 느낌이 강했다.
에니악이 이름을 알린 것은 지난 2006년 방영되어 마니아층을 형성했던 드라마 ‘소울메이트’의 OST에 참여하면서부터다. 당시 에니악은 ‘아이 러브 유’(I Love You)와 ‘아이 미스 유’(I Miss You)를 작사·작곡해 노래까지 불렀다. 이후 2009년 OST곡을 포함해 6곡이 수록된 EP앨범 ‘I ♡VE’로 데뷔한다. OST 참여 이후부터 데뷔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셈이다.
“제가 2006년 당시 에니악이라는 이름으로 음악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었어요. 그때는 음악을 본격적으로 하기 전이었고 그냥 ‘아이 러브 유’라는 음악을 만들어 올린 거였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인디 차트에서 1위도 하고 기획사에서 계약하자며 전화가 오기도 했어요. 그 중 한 기획사에서 자기들과 함께하면 ‘소울메이트’ OST에 음악을 넣어 주겠다고 해서 곡을 넘겨 드렸죠. 드라마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에요. 그러고 나서 늦은 나이에 군대(방위산업체)에 갔다 오고서야 본격적으로 데뷔 앨범을 준비했으니 중간 기간이 붕 뜬 거죠.”
에니악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인터넷에 올려진 프로필에도 본명은 물론이고 나이도 게재돼 있지 않다. 단지 한양대학교 경영학과 출신이라고 나와 있을 뿐이다. 신비주의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저으며 “알릴 내용이 없었다”고 답하며 웃는다. 인적 사항 홍보에는 노력을 할애하지 않았지만 음악을 접하고, 만들고, 알리는 과정에는 꽤 긴 시간과 공을 들였다.
“신비주의는 아니고요. 제가 아직 신인이고 본명보다는 ‘에니악’이라는 이름을 먼저 알려야 될 것 같아서 그랬어요. 음악은 초등학교 때부터 했어요. 피아노로 전국 콩쿠르 1위도 했죠. 당시 음악을 가르치던 학원 선생님이 저 보고 음악고등학교를 가야 한다며 중학교 3년 동안 공짜로 가르쳐 주시기도 했어요. 하지만 전 음악고등학교를 갈 생각이 없어서 막판에 인문계를 가겠다고 선언했죠. 그 당시에 왜 그랬는지, 아마 어린 나이에 ‘음악을 하면 (생활하기) 힘들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나 봐요. 대학 와서도 음악으로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음악은 그냥 좋아서 만들었을 뿐이었죠. 그러던 중 고등학교 때 함께 취미로 음악 하던 친구가 한 기획사에 들어갔는데, 저와 함께 만들었던 노래를 기획사 사장이 들어보고 좋다고 해서 그때부터 음악을 본격적으로 하게 됐죠.”
재미있는 것은 오래 전부터 OST에 참여하며 음악을 만들었던 에니악의 첫 공식무대가 인디 신의 대표무대 격인 홍대 클럽이 아니라 지난 5월 서울 난지공원에서 열린 그린 플러그드 페스티벌이라는 점이다.
“사실 에니악으로 방송을 하거나 활동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홍대에서의 클럽 공연도 전무했죠. 앨범을 낸 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섭외가 와도 고사할 정도였죠. 에니악이란 이름으로 발생하는 음원 수익도 생각 안 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활동할 마음이 생겼어요. 앞으로 앨범을 정기적으로 내고 싶거든요. 그린 플러그드 페스티벌에서는 사실 큰 실수를 했어요. 전 건반을 치고 여자 분이 노래를 불렀는데 피아노가 잘못된 거예요. 당황해서 제가 키보드를 꺼버리고 다시 하겠다고 알린 후 다시 연주를 했죠. 악기 자체가 오래 켜있으면 그런 문제가 생긴다고 하더라고요. 같은 날 YB(윤도현 밴드)도 그런 실수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다행히 날씨가 좋아서인지 다들 웃으면서 넘어가 주셨고요.”
에니악의 ‘소년은 달린다’는 일렉트로닉 팝, 모던 락, 어쿠스틱 사운드가 어우러진 독특한 앨범이다. 단순하면서 정갈하고 감성적인 반주와 오토튠을 적극 활용한 보컬에 일렉트로닉 팝과 아날로그 사운드가 어우러진 음악을 만들어냈다. 가사 역시 ‘푸르렀던 날들의 달콤쌉싸름한 기억들과 추억들’과 같이 여성스러운 느낌이 풍길 만큼 담백한 단어들의 연결이 인상적이다.
독특한 것은 이전에는 자신이 곡을 만들고 노래까지 불렀지만 이번 앨범에서는 객원 보컬을 참여시켰다. 신아연, 시라, 유지유가 그들이다. 객원 보컬을 둔다는 점에서 015B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객원 보컬을 참여시킨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제가 앨범을 만들 때 어떤 콘셉트를 잡고 시작하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봄노래를 만들어야겠다’라고 생각하면 발랄한 노래를 부를 여자 멤버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그런 친구를 구해요. 이번에 세 멤버를 찾는데 반년 이상 걸렸죠. 신아연 씨 같은 경우에는 이번에 처음 노래를 불러 본 아마추어예요. 그런데 그냥 제 노래에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탁했죠. 앞으로도 두 가지 방법을 생각 중이에요. 하나는 에니악의 이름에 어울리는 일렉트로닉 방향이에요. 제 목소리가 일렉트로닉 음악이랑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그 쪽으로 가면 저의 비중이 높아질 거고요. 그게 아니라 (대중)가요의 방향이라면 다른 목소리를 찾아서 객원 보컬로 함께하는 거죠.”
‘I ♡VE’나 ‘소년은 달린다’를 듣다 보면 어느 대목에서는 지난 1992년 ‘한 사람을 위한 마음’ 등으로 인기를 모았던 이오공감이 떠오른다. 산뜻한 느낌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에니악 스스로 말하는 음악적 성향은 무엇일까.
“제가 열둘에서 열세 살 때 본격적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다양한 문화를 접하게 됐는데요. 당시에는 윤상, 015B, 이오공감 등의 곡이 유행했죠. 의도하지 않아도 영향을 많이 받게 된 것 같아요. 또 고등학교 때까지는 헤비메탈만 들었어요. 대학 때도 펑크밴드를 하고 싶었고, 여전히 다프트 펑크 (Daft Punk)를 제일 좋아해요. 요즘도 공연 간간이 록을 해요, 평소의 제 음악보다 센 느낌을 주죠. 하드한 일렉트로닉 음악을 좋아해서 아마 정규앨범이 나오게 되면 대중가요의 느낌을 뺀 좀 더 일렉트로닉한 느낌을 살린 음악을 선보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변화를 예고하는 에니악, 컴퓨터의 발전에 비춰 봐도 당연한 미래인지 모르겠다. 그의 눈부신 도약, 하지만 따뜻한 아날로그적 감성을 잊지 않는 비상이 되기를 기대한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유명준 기자 neocross@kukimedia.co.kr / 사진 박효상 기자 islandcity@kuki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