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숨기고 변사체 지문 채취한 악바리 그녀…첫 여성 치안정감 이금형

임신 숨기고 변사체 지문 채취한 악바리 그녀…첫 여성 치안정감 이금형

기사승인 2013-04-04 20:26:01


[쿠키 사회] “인생은 한 폭의 수채화예요. 수채화는 물감에 물을 섞어서 투명하게 그려야 하죠. 인생이라는 흰 도화지에 투명하고 부끄럽지 않게 채색하며 살고 싶어요.”

소녀의 꿈은 화가였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린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 당연히 미술대학에 진학할 줄 알았다. 충북 청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암투병 중이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 어머니 혼자 6남매를 뒷바라지하기는 버거웠다. 당장 일거리가 필요했다. 미대 진학을 포기하고 경찰이 됐다. “딸은 경찰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의 권유도 있었다. 36년이 지나 그는 경찰 역사상 첫 여성 치안정감이 됐다. 그는 “아직도 인생 도화지에 그려나가야 할 부분이 많다”며 식지 않은 열정을 내비쳤다. 이금형(55) 신임 경찰대학장을 지난 3일 경기도 용인 경찰대학 학장실에서 만났다.

만난 사람=이용상 사회부 기자

이 학장은 1977년 12월 17일 순경 공채로 경찰 제복을 입었다. 타고난 그림 실력은 범인을 잡는 데도 도움이 됐다. 충북 청주경찰서에서 청소년 선도 방송을 하던 그는 82년 몽타주 요원 선발시험에 합격했다. 경찰청 과학수사과에서 수배령이 떨어진 범인의 모습을 그리는 임무를 맡았다. 선발시험에서는 배우 최불암을 그렸다.

그는 아동·청소년 문제나 학교폭력, 성폭력 등 생활안전 업무의 최고 전문가로 정평이 나있다. 2000년 5월 운동회에 가는 초등생 여아를 어른 두 명이 성폭행한 사건이 민생치안 전문가로 들어선 계기가 됐다. 피해 아이는 응급처치가 필요했지만 일반 병원에서는 범죄증거 채취 능력이 부족해 제대로 진료할 수가 없었다. 이 학장은 곧바로 응급처치와 증거 채취를 할 수 있는 긴급지원센터를 경찰병원 내에 만들었다. ‘원스톱지원센터’의 전신이다. 학교폭력에 시달리다 자살한 학생의 어머니가 ‘귀신이 되어서라도 복수하겠다’고 쓴 노트를 들고 찾아왔을 때는 학교폭력의 심각성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2005년 경찰청 여성청소년과장으로 ‘성매매와의 전쟁’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는 바쁜 업무 중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이 학장은 따로 시간이 없어 이를 닦거나 설거지할 때 녹음기를 켜놓고 공부했다. 2002년 동국대에서 석사학위를 딸 때까지 녹음기 5대가 망가졌다. 2008년엔 비행청소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학장은 “제가 여성이기 때문에 어머니 같은 포용력 있는 리더십을 원하는 사람도 있지만 업무 장악력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목소리가 단호했다. 그는 3일 정식 업무를 시작했지만 책상에는 이미 업무 서류가 담긴 바인더 6∼7개가 놓여 있었다. 그는 “경찰은 국민의 생명과 신체, 재산을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부하 직원들에게 마냥 부드러울 수만은 없다”고 말했다. 이 학장이 입고 있던 하얀 제복 셔츠의 주름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누군가 저에게 ‘10만 경찰 중에 가장 남자다운 것 같다’고 하더라”며 웃는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그는 5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나 전쟁 만화를 보고 딱지치기를 하며 자랐다고 했다. 남성 문화에 익숙한 점이 경찰생활을 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강력범을 마주치고, 오랜 기간 집을 비우고, 화도 ‘팍’ 낼 수 있어야 하고, 술도 잘 견뎌야 할 때가 있다”며 “이런 부분은 저의 어릴 적 환경에서 저절로 익숙해진 것 같다”고 했다.

이 학장의 단호함은 사건 처리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2006년 발생한 ‘마포 발바리 사건’을 떠올렸다. 서울 마포·서대문 지역에서 연쇄적으로 발생한 성폭행한 사건이다. 당시 이 학장은 서울 마포경찰서장으로 부임했다. 고생 끝에 범인을 잡은 뒤 이 학장은 서장실에서 직접 ‘발바리’를 만났다. 범인은 이 학장 앞에서 “늙으신 어머니와 둘이 어렵게 살고 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변명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고 했다. KBS 개그콘서트 ‘나쁜 사람’이 떠올랐다. 불쌍한 범인에게 경찰이 동정심을 보이는 걸 희화화한 코너다. 이 학장은 달랐다. 그는 범인에게 “초등학생까지 성폭행 대상으로 삼았으면서 용서를 바라냐”며 꾸짖었다.

경찰 ‘넘버2’까지 올라섰지만 집에서는 ‘계모’로 불린단다. 첫째 딸을 임신했을 때는 몽타주 요원으로 범인 얼굴을 그렸고, 둘째 딸 임신했을 때는 임신 사실을 숨긴 채 토막 변사체의 지문을 채취할 정도였다. 그는 “여성이라고 힘든 일을 못한다는 티를 내기 싫었다”고 했다. 대형 유통회사 임원인 남편도 시간이 없어 시댁에서 아이를 돌봤다. 이 학장은 당시 ‘경찰을 그만둬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첫째 딸이 사춘기 시절 잠시 방황할 때도 그랬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밤늦은 시간 학원에서 나오는 딸을 차로 집까지 데려다주기 시작했다. 차로 불과 3∼4분밖에 안되는 짧은 거리였지만 그때 나눴던 대화로 딸과 가까워졌다. 그는 “딸은 저와 짧은 한두 마디라도 원하고 있었던 것”이라며 “지금은 사위한테 삼계탕을 끓여주는 장모”라고 했다.

그의 수첩엔 ‘하루하루 자신감을 가지고 살자’는 글귀가 적혀 있다. 그는 “주변에서 제게 대단하다고 그러는 분들이 있는데,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최선의 길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경찰 입문 후 ‘1만3140일’이 흘렀다는 사실을 따져본 뒤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이 학장은 존경하는 인물로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을 꼽았다. 그는 “낸시 펠로시는 4명의 자녀가 있는데 ‘사회의 모든 역할은 엄마 역할의 확장’이라는 얘기를 했다”며 “경찰 일도 ‘내 일’ ‘내 가족의 일’이란 생각으로 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데 한쪽 벽면에 걸린 액자가 눈에 띄었다. 이 학장의 캐리커처가 그려져 있었다. 그가 광주지방경찰청장이던 지난해 2월 기동중대 방문 당시 중대원 100여명이 각자 이름을 적어 선물로 준 것이다. 이 학장은 “지휘관은 외로운 존재인데 이 선물을 받으며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감격했다”고 말했다. 그림 속 이 학장은 누군가를 껴안으려는 듯 양팔을 벌리고 있었다.

sotong203@kmib.co.kr

■ 이금형 치안정감은

이금형 신임 경찰대학장은 충북 청주 출신으로 1977년 순경으로 경찰에 입문했다. 85년 경찰청 감식과 소속 감식관이었던 그는 둘째 아이를 임신한 채 토막 난 사체의 썩은 손목을 씻으며 지문을 찍은 일화가 전해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고시 출신이 4번의 승진으로 오르는 치안정감 계급을 순경 공채 출신인 그는 9번 승진 끝에 올랐다. 경찰서장급인 총경을 단 것은 여경 중 세 번째였고, ‘경찰의 별’로 통하는 경무관은 두 번째였다. 재직 기간 주로 여성·청소년 분야 등에서 활동했다. 서울 마포경찰서장, 충북지방경찰청 차장, 경찰청 생활안전국장, 광주지방경찰청장 등을 지냈다.

2008년 비행청소년 연구로 박사학위(동국대)를 딴 그는 경찰에서 아동·청소년 문제나 학교폭력, 성폭력 관련 업무의 1인자로 꼽힌다. 서울 마포서장으로 재직하던 2006년 서울 마포·서대문 일대 주민들을 공포에 빠뜨렸던 연쇄 성폭행범, 이른바 ‘마포 발바리’를 검거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여경 기동수사반 전국 지방청 확대·설치, 성매매 피해여성 긴급지원센터, 성폭력 피해자 지원을 위한 원스톱지원센터, ‘182’ 실종아동찾기 센터 설치도 그의 작품이다. 대형 유통업체 임원으로 근무하는 남편과 전문직에 종사하는 딸 셋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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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기 기자
sotong20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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