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채윤의 뮤직에세이(4)] 조용필 ‘단발머리’, 그녀
짝사랑에 있어서는 선수다. 좋아하기 시작하면 그와 멀어지는 건 시간문제다. 누군가 먼저 손 내밀어 마음이 움직인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김이 없다. 좋아하지 않는 척도 해보지만 쉬 들키고 만다. 무관심하려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여자들은 다르다. 마음 가는대로 하면 된다. 그 마음이 전해진다. 진심이 통한다. 물론 좋은 여자들에 한해서. 그런 여자를 알아보는 눈은 가지고 태어난 것 같다.
웃는 인상이 귀여운 그녀는 꽃을 좋아한다고 했다. 좋은 사람 같아 보였는데 함께 꽃시장에 가지 않겠냐며 먼저 마음을 열어 보였다. 밤 12시에 문을 여는 새벽시장이었던 탓에 몇 번 마음먹는 동안 한번 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일찍 잠자리에 드는 편이라 낮잠을 자두지 않으면 영영 못 갈 것 같아 모두가 깨어있는 오후 잠을 청했다. 꽃도 궁금했지만 실은 먼저 마음을 열어 준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각양각색의 꽃들이 눈에 들어왔다.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누군가에게 기쁨을 선사할 선물들이었다. 장미와 장미가 아닌 꽃들로 나눌 수 있을 만큼 장미꽃이 많았고 난 한눈에 엷은 분홍색 카네이션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흔히 보던 붉은 카네이션이 아닌 여리고 고운 빛깔의 카네이션은 전혀 다른 꽃이었다. 그녀는 구경하는 내내 시선이 머무는 꽃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라넌큘러스와 리시안셔스
“라넌??? 리... 음.. 셔스”
특별히 예쁘다고 생각해 이름을 외워두고 싶어 눈에 띌 때마다 반복해서 발음해 보았지만, 번번이 틀렸다. 우아한 생김새만큼 어려운 이름이었다. 수많은 꽃들 중에 콕 집어 좀 더 예쁘다고 생각한 건 나뿐이 아닌 듯 결혼식 부케로도 많이 쓰인다고 했다.
지금은 카네이션만큼이나 좋아하는 꽃이 되어 이름을 잊을 리 없는데, 인내심을 가지고 번번이 고쳐 일러주던 그녀 덕분이다. 꽃밭에 초대해준 것도 고마운데 돌아가는 길에 그녀는 내게 꽃을 선물했다. 하지만 그 날 내가 받은 최고의 선물은 꽃보다 그녀였다.
그 뒤로 한 달에 두어 번 꽃시장에 간다. 낮 12시까지 문을 연다는 걸 알고는 오전에 다녀오곤 한다. 야행성인 그녀와 함께 가는 일은 어렵지만 우린 매일 같이 서로의 안부를 묻는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벌써 반년이 흘렀다.
단발머리, 그녀
'그 언젠가 나를 위해 꽃다발을 전해주던 그 소녀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그 소녀가 보고 싶을까
비에 젖은 풀잎처럼 단발머리 곱게 빗은 그 소녀
반짝이던 눈망울이 내 마음에 되살아나네'
(조용필 ‘단발머리’ 1980)
여느 때 보다 꽃들이 일찍 시들어 버렸다. 봄이 되어 꽃값이 저렴해져 많은 양을 사온 바람에 돌봄에 소홀했다. 많은 꽃을 매일 조금씩 끝을 잘라내고 물을 갈고 하는 일들이 버거웠다. 꽃은 가꾸는 만큼 오래 간다. 적당히 데려올걸, 늘 그랬듯.
인간관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돌볼 수 있을 만큼만 관계 맺고 정성을 다해 가꾸어 나가야 하는 것. 많은 꽃을 보기보다 오래 두고 보는 편이 나는 더 좋다.
좋아하는 사람을 떠올린다. 꽃이 있는 동안은 혼자여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바쁘다는 이유로 꽃시장에 가지 못해 꽃이 없는 날에는? 단발머리의 그녀가 있어 괜찮다. 비가 내린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한채윤 / 배우 & 싱어송라이터 서강대학교 영미어문 졸업. 오랫동안 잘 안 팔리는 배우로 지내면서 넘쳐나는 시간 동안 기타도 배우고 피아노도, 노래도 배우다가 이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 해서 어느 날부터인가 곡을 쓰기 시작. 지난 3월 자작곡 미니앨범 '한채윤 첫번째_너무 흔한 이야기' 발매. 여러 편의 단편 영화와 작은 역할로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 대표작으로는 뮤지컬 '심야식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