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희의 스몰토크 lite] ´모래시계´ 김종학 PD, 고사(枯死)하다

[전정희의 스몰토크 lite] ´모래시계´ 김종학 PD, 고사(枯死)하다

기사승인 2013-07-23 17:48:18

[친절한 쿡기자 - 전정희의 스몰토크] 1995년 2월 초로 기억됩니다. 김종학 PD 연출의 드라마 ‘모래시계’ 마지막 장면 촬영이 지리산 노고단에서 있었습니다.

이날 촬영은 한 줌의 재로 변한 태수(최민수 분)의 유골을 그의 연인 혜린(고현정)과 친구 우석(박상원)이 노고단 기슭에 뿌리는 신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SBS TV ‘모래시계’는 방영 17회 만에 시청률 50%를 돌파하며 전국의 시청자들이 마음을 졸이며 즐겨 보는 드라마였습니다. 드라마 주시청자층이 아니었던 30~40대 남성들을 ‘귀가시계’로 만들었지요.

이날 김종학 PD는 마지막 작업을 진두지휘했습니다. 영하 20도의 강추위 속이었죠. 많은 매체들이 그 마지막회 촬영 장면을 스케치하기 위해 노고단 정상을 밟고 있었습니다.

김 PD는 노고단이 멀리 천왕봉과 섬진강이 배경으로 있으나 어딘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더니 스태프에게 지시해 쓰러진 고목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구름이 노고단을 휩싸면서 ‘그림’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신을 살려줄 상징적 장면이 필요했죠.

스태프는 고사한 나무를 간신히 구했습니다. 그리고 낑낑거리며 고현정과 박상원이 있는 쪽으로 옮겼습니다. 정확히 두 사람이 있는 노고단 정상 바위 아래에 숨어 그 고목을 두 인물 배경으로 드러나게 했던 거죠. 그때서야 김 PD의 표정이 밝아졌습니다. 이 한 장면이 갖춰지지 않자 작가 송지나와 40여명의 제작진은 종일 강추위 속에서 벌벌 떨며 큐사인을 기다린 거죠. 그의 별명이 ‘독종’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죠.

고사한 고목은 칠지도 칼날처럼 펼쳐져 있고, 고현정과 박상원은 유골 함을 열어 지리산 바람에 유골을 뿌렸습니다. 그 그림이란 빙하기 바이칼호 얼음 같다고나 할까요? 명장면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이 장면 촬영은 정확히 2분이었습니다. OK사인이 떨어지고 출연진과 제작진은 박수 치는 것도 잊고 한 동안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죠.

김 PD도 그 부리부리한 얼굴에 아무런 표정 없이 섬진강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한국 드라마사상 한 획을 긋는 ‘모래시계’는 그렇게 헌정되었죠.

‘모래시계’는 단순한 드라마라기보다 ‘한국현대사’의 영상교과서였습니다. 빼어난 PD가 ‘영상 한국현대사’를 완성한 시간이었습니다. 18년 전 일입니다.

한국드라마는 아직 ‘모래시계’를 뛰어넘는 대작이 없는 듯 합니다. 경박단소한 드라마는 많으나 우리의 정서와 삶의 가치, 불의에 대한 항거 등을 제대로 반영한 ‘고전’이 ‘모래시계’ 이후로 없습니다.

그 거장 김종학 PD가 23일 ‘고사(枯死)’했습니다. 명감독으로 고사한 건지, 세파에 시달리다 못해 고사한 건지 알 수 없습니다만 어쨌든 그는 ‘고전’으로 남습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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