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울리는 블랙컨슈머
[쿠키 경제] 올해 초 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던 40대 여성 A씨는 “음식에 들어있던 돌을 씹어 금니가 떨어져나갔다”며 업체 측에 치료비와 정신적 피해보상비, 대표이사의 사과를 요구했다. 수차례 매장을 찾아가 큰소리로 항의하기도 했다. A씨는 “합당한 보상을 안 해주면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식품의약품안전처 등 관계 기관에 고발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업체는 음식값 환불과 위로비 지급을 약속한 뒤 사실관계 확인을 부탁했다. 그러나 A씨는 막무가내였다. 업체가 “돌을 보여 달라”고 하면 “이미 버려서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턱 관절에 이상이 있는지 확인해보자”고 하면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냐”며 되레 화를 냈다.
이 업체는 명확한 근거가 없는 상태에서 고객의 일방적인 요구를 무작정 수용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보고 한국소비자원에 중재를 요청했다. 업체 관계자는 “생산물 배상책임 보험으로 일정 금액을 보상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했다”면서 “소비자원은 ‘이 같은 사례가 너무 많이 접수되니 웬만하면 합의하라’고 권유했다”고 말했다.
상습적이고 악의적인 방식으로 제품과 서비스에 하자고 있다고 위협해 금전적인 대가를 요구하는 악덕 소비자는 개그 프로그램에만 있는 게 아니다. 블랙컨슈머가 퍼트린 허위사실이 한 기업에 치명적인 손실을 입힐 수도 있다. 또 1%의 블랙컨슈머 때문에 99%의 선량한 소비자가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모피 코트를 생산하는 중소 의류업체는 지난 3월 겨울 내내 입은 것으로 보이는 모피 코트를 들고 와 “실밥이 느슨하게 재봉돼 있다”며 반품을 요구하는 소비자 때문에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결국 이 업체는 두 손을 들고 모피 코트 값 전액을 환불해줬다. 2011년에는 회사원 김모(28)씨가 “스마트폰의 배터리가 폭발했다”며 대기업을 협박했다가 자작극으로 판명나 벌금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기업 관계자들은 블랙컨슈머의 수법이 날이 갈수록 교묘해져 대응하기가 점점 더 쉽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요즘 블랙컨슈머들은 협박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요구조건을 먼저 말하지 않는다”면서 “기업이 원하는 걸 제안할 때까지 계속 허위사실을 유포하거나 회사 앞에서 시위를 해도 별다른 대책이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특히 트위터나 페이스북, 카카오톡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 어떤 식으로든 이름이 거론된 기업들은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하는 게 쉽지 않다. 한 기업 관계자는 “사람들은 블랙컨슈머가 유포한 거짓말만 기억할 뿐 ‘조사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에는 관심이 없다”고 답답해했다.
소비자의 불만 제기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불평·불만이 단초가 돼 제품과 서비스의 질이 향상되는 경우도 많다. 다만 악의적 의도를 갖고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경우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기업 입장에서는 블랙컨슈머에게 대응해야 하기 때문에 서비스 비용이 커지고, 이는 제품 원가에 반영돼 결국 대다수 선량한 소비자가 높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사회 전반에 불신이 팽배해지는 점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이영애 인천대 소비자아동학과 교수는 “블랙컨슈머 사례가 반복되다 보면 기업이 소비자의 정당한 지적에도 예민하게 반응해 결국 합리적인 의견을 표출하는 다수의 소비자가 피해를 입게 될 가능성이 크다”면서 “권리와 책임을 명확히 인식시키는 소비자 교육이 확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권지혜 기자 jhk@kmib.co.kr
기업 울리는 진상고객들… 구두 신고 허리디스크 걸렸어, 보관함에 넣은 물건 없어졌네
A대형마트는 최근 물품보관함에 넣어뒀던 물건이 없어졌다며 항의하는 50대 여성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이 여성이 보관함을 이용한 건 지난 4월. 4개월이 지난 뒤에 나타나 맡겨놓은 물건을 당장 내놓으라며 직원에게 행패를 부렸다. 내부 규정에 따라 이미 보관함 내 물품을 처분한 마트 측은 분실한 상품의 가격만큼 현금으로 보상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자 이 고객은 갑자기 다른 보관함 3곳에도 물건을 넣어뒀는데 없어졌다면서 함께 보상해 달라고 요구했다. 보상금을 받은 뒤에는 본사를 찾아가 언론사에 제보하겠다면서 으름장을 놨다. 결국 A대형마트는 이 여성을 업무방해 혐의로 경찰에 신고했다. 그녀는 알고 보니 다른 대형마트에서도 비슷한 방법으로 수차례 현금을 챙긴 전형적 블랙컨슈머였다.
◇블랙컨슈머 천태만상…이래도 고객이 왕?=블랙컨슈머의 표적은 소비자를 직접 대면하거나 평판에 민감한 유통업체, 식품업체, 콜센터 등이다. 이 업체에는 황당하고 터무니없고 악의적인 민원이 종종 접수된다.
B식품업체는 지난해 말 건강기능식품을 구매한 60대 남성이 해당 제품을 먹고 오히려 건강이 나빠졌다며 건강검진을 받게 해달라고 요청해 황당했던 경험을 털어놨다. 처음에는 ‘시끄러워서 좋을 것 없다’고 보고 100만원이 넘는 건강검진 프로그램을 예약해줬다. 그런데 이 남성은 제품을 섭취한 가족 모두가 검사를 받아야 한다면서 추가 비용을 내라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이 업체는 식품의약품안전처에 제품 분석을 의뢰했다. 이후 60대 남성은 자취를 감췄다.
C백화점에서 구두를 산 30대 여성은 신발을 신고 한 달 만에 허리디스크가 생겼다며 환불과 더불어 정신적 피해배상을 요구했다. 구두 판매업체는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 문제가 있다는 게 확인되면 보상하겠다면서 함께 병원에 가자고 했다. 이 여성은 “내일 다시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홈쇼핑 업체들이 가장 많이 겪는 악성 민원은 “물건을 받지 못했다”고 우기는 것이다. ‘속옷을 주문했는데 빈 상자만 왔다’거나 ‘신발을 주문했는데 한 켤레만 왔다’는 식이다. 홈쇼핑 업체 관계자는 “상품 출고 전에 한 차례 검수를 하고 제품 포장 과정을 CCTV로 촬영한다”며 “포장 후에는 무게를 재는 등 여러 단계의 검증 작업을 거치기 때문에 빈 박스만 배송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쉬쉬하던 기업들 “억지 요구엔 강력 대응”=이미지 실추를 우려해 쉬쉬하던 기업들도 최근 대응방식을 바꾸는 추세다. 몰지각한 일부 고객에까지 무조건 친절을 베푸는 것이 결과적으로 회사 직원과 대다수 소비자에게 피해를 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대백화점은 지난 5월 고객이 상품 구입 후 결제하면 영수증과 함께 상품안심카드와 선물교환증을 자동으로 출력하는 ‘원클릭 안심약속제’를 도입했다. 판매사원이 상품 취급 시 주의사항을 고객에게 설명했는지 안심카드에 서명하도록 하고 선물교환증에 상품 판매처, 교환 기준 등의 정보를 담았다. 블랙컨슈머 가운데 상당수가 상품 취급주의 정보를 제대로 고지 받지 못했다고 우기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아예 트집거리를 원천봉쇄하겠다는 취지다.
LG전자와 LG유플러스는 서비스센터나 대리점을 방문한 고객이 업무에 지장을 줄 정도로 난동을 부리면 경찰 협조를 받도록 하고 있다. KT의 자회사인 케이티스(KTIS)는 지난해 7월부터 전화상담 업무에 ‘삼진아웃제’를 도입했다. 전화를 걸어 협박·폭언·성희롱 등을 하는 고객에게 1단계로 경고 조치를 하고 팀장이나 관리자급이 직접 삼진아웃제에 대해 설명한 뒤 그래도 그치지 않으면 법적 대응에 들어간다. SK텔레콤도 상담원에게 폭언 등을 할 경우 전화상 경고, 고객 주소지로 내용 증명 발송, 고소·고발하는 3단계 프로세스를 운영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 김태영 전문위원은 “상습적이고 고의적인 불량고객은 시장에서 퇴출돼야 한다”며 “기업 내 특정 부서 또는 한 기업에만 국한하지 말고 업계 차원에서 불량고객의 정보를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 연구위원은 블랙컨슈머 관리 6가지 원칙으로 소비자분쟁해결 기준에 의거한 원칙적 대응, 블랙컨슈머 데이터베이스 구축과 정보 공유, 전담팀 운영, 합리적인 보상 기준 마련 등을 제시했다. 대한상의는 지난 3월부터 한 달에 한 번 ‘블랙컨슈머, 기업의 대응전략’ 교육과정을 진행하고 있는데 월평균 20여명의 기업 관계자들이 꾸준히 참석하고 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권지혜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