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희의 시사소설] 청계천 녹조라떼로 인근 민가 뱀 잇단 출몰

[전정희의 시사소설] 청계천 녹조라떼로 인근 민가 뱀 잇단 출몰

기사승인 2013-08-25 12:02:01

[친절한 쿡기자 - 전정희의 시사소설 ‘조선500년 익스트림’]

오간수문에서 녹조도깨비가 나왔다는 소문이 도성 안에 삽시간에 퍼졌다. 땡볕이 강해 기왓장이 쩍 벌어질 지경인 팔월 스무닷새 날이었다.

영조 36년 오간수문(지금의 청계천 6가) 안쪽으로 준천(濬川)한 직후 사대문 안은 악취가 진동했다. 오간수문 안쪽 청계천은 마리교 효경교 하랑교 수표교 장통교 근처 보(洑)마다 물이 가득했는데 가뭄으로 그 물을 빼지 않으면서 녹조가 생겼다.

그 녹조는 우포도청(지금의 광화문 동아일보사옥) 뒤편 중학천까지 밀고 올라와 경복궁 건춘문에까지 이르렀다. 좌·우포도청 순검들이 나서 중학천에 재를 뿌린다, 녹조를 걷어 올린다 난리를 쳤지만 물색은 바뀌지 않았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 영조가 창덕궁에 머물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아니하였다면 근정전까지 악취가 미쳐 경연이 곤란했을 것이다.

청계천 녹조라떼, 경복궁에까지 미치다

“수문 근처에 사는 여편네 하나가 입성이 하도 더러워 청계천물에서 냄새가 나건 말건 녹조물에라도 빨려고 갔다가 녹조물에서 허우적거리는 도깨비를 봤디야. 눈을 째지고, 귀는 크고, 배는 애 밴 년처럼 불쑥 나왔다는 거여.”

아낙네들은 도성에도 곧 마마가 도는 전조가 아니냐며 불안해하며 너나없이 북한산에 달려가 마마신께 자기 가족을 지켜 달라고 빌었다. 제수 음식 준비가 어려운 아낙네들은 가까이 무당을 찾아가 녹조도깨비를 막는 부적을 그려 달라해 안방 벽에 붙여 놓고 도깨비의 눈을 찌르거나 달래는 치성을 드렸다.

그럼에도 도성 안 녹조도깨비를 봤다는 소문은 도성을 돌고 돌아 하루 만에 성밖 불광리, 서강방, 마포나루, 둔지방, 한강방으로 퍼졌다.

“이것이 다 청계천 석조보 때문일 것이여. 수신을 놀래켜서 그랴. 양반 지네들 청계천서 뱃놀이 하것다고 석조보를 맹글더니 수신이 노해 역병이 도는 거여. 게다가 녹조도깨비까지 나타나다니…”

검·경, 녹조라떼 유포자 체포 명령

의금부는 민심이 심상치 않자 청계천 보의 녹조물은 날이 더워 그런 것이라는 방을 종로 시전 중심으로 백 걸음마다 한 장씩 붙였다. 또 ‘녹조도깨비가 나타났다며 민심을 뒤흔드는 자는 붙잡아 곤장 백대의 장형에 처하겠다’고 으름장 놓았다.

좌·우포도청(서울지방경찰청 격)이 아닌 의금부(검찰청 격)까지 나서 유언비어 차단에 나선 것은 팔도에서 봄부터 창궐하고 있는 역병 때문이었다. 영조는 역병으로 죽은 자가 즐비하다는 팔도의 장계를 받고 하교를 내렸다.

‘우리 백성의 친척, 형제, 고아, 과처(寡妻)가 울부짖고 서러워 하니 생각이 여기 미치매 저절로 처절해 진다. 경외에 분부하여 죽은 자는 방법을 다하여 거두어 묻어주고 산 사람은 특별히 구원하여 살려내게 하여라’

이 무렵 성 밖의 사망자도 사천 명에 달했다. 강도(江都·강화도·정부세종청사 격)에서의 사망자도 삼백사십구명이었다. 영조도 세제 때 마마를 앓아 역병이 돈다는 소식엔 애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상황에 녹조도깨비 유언비어가 임금 귀에 들어가면 삼정승을 비롯해 승정원 도승지 등이 파직과 함께 유배도 각오해야할 형국이었다.

야권, 녹조라떼 “이현박 책임” 총공세

이때 정국은 노·소론의 정쟁이 극에 달해 있었다. 세자 시절부터 정파 폐단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영조는 탕평책을 써가며 정국을 장악하려 했으나 사색당파의 정권독점을 위한 다툼은 정미환국, 이인좌의 난 등을 거치면서 경연이 불가능할 정도로 격화됐다.

좌당 소론은 녹조도깨비 소문이 청계천 보 설치로 인한 재앙이라며 집권당 노론을 공격하고 나섰다. 남인과 소북도 이에 합세했다.

소론 영수 김명길은 “전 한성판윤 이현박이 사족들 뱃놀이터를 만들기 위해 보를 설치했으나 결과적으로 십오만 도성 사람들의 빨래터를 없애 거지꼴을 못 면하게 하고 있다”며 공격했다.

남인 영수 이진보도 “청계천을 파헤치면서 지세가 뒤바뀌어 뱀들이 민가에 출몰해 인근 백성 아낙네들이 밥하러 부엌으로 발을 내딛다 똬리 틀고 있는 뱀을 밟아 혼절하는 등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며 “그 주범 이현박 전 한성판윤을 당장 잡아들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집권당 노론 영수 황근심은 삼색당파의 공세가 심해지자 의금부 채대검을 불렀다.

“녹조도깨비가 무슨 말이오? 염병이 돌아 십만 명이 죽어 나자빠지는데 도성 안에서 이런 황당한 얘기가 나돈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이오? 포도청 순검을 다 동원해서라도 유언비어 퍼뜨리는 자를 잡아야 하는 것 아니오?”

채대검은 머리를 조아리며 제대로 답을 못했다.

“그것이…”

“빨리 말해 보시오. 화급하오. 삼색 놈들보다 더 무서운 게 민심 아니오.”

“그것이…그것이 비단 근거 없는 소문만은 아니옵니다.”

“근거 없지 않다니? 사실이기라도 하단 말이오? 어허, 그런 재앙이라면 임금이 어의를 벗어야할 하늘의 진노 아니오.”

“실은 전 한성판윤 이현박 때문이옵니다.”

시민들 “녹조류 악취 때문에 살 수가 없다”

녹조도깨비를 봤다는 소문이 돌기 이틀 전이었다. 한성판윤을 퇴임한 후 영의정을 거쳐 정계에서 은퇴한 이현박은 북촌(요즘의 강남) 계동 사가로 물러나 의금부 나졸들의 호위를 받으며 지냈다.

그러나 그가 재임 당시 파헤친 청계천 준천과 보설치로 인해 도성 백성이 극심한 식수와 용수난에 시달렸다. 물이 고여 있는데 그 물이 그림의 떡과 같은 어이없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보설치 전에는 청계천 빨래터에서 두런두런 얘기도 하며 빨래하는 재미에 살았는데 이놈의 보 때문에 빨래판 돌이 다 잠겨 흙 위에 대고 방망이 두들기게 생겼네. 물비릿내 나서 당최 빨래를 할 수가 없어.”

도성 여자들은 너나없이 욕을 해댔으나 씨도 먹히지 않았다. 성질 급한 여편네 하나가 신문고로 쫓아가 북을 치려 하자 의금부 나장들이 서지를 내밀며 이름, 사는 곳, 나이, 가족관계 등을 쓰라는 바람에 그 여편네 쭈빗거리고 뒷걸음질을 쳐야 했다. 그것도 한자로 쓰라고 엄포를 놓았다.

“미친놈들이 따로 없네. 아낙들 열에 열 다 한자를 쓸 줄 모르는디 한자로 써야 신문고를 두드리게 해주겠다고? 말만 번드르르 한 그 딴 놈의 북 불살라 버려야제 원. 나장 지 놈들은 한자를 알어? 지나 내나 낫 놓고 ㄱ자도 모르면서 유세 떨긴. 나 참 기가 막혀.”

“이 여편네야. 주리 안 당한 것도 다행인 줄 알어. 나는 청계천에서 빨래하는 거 이미 포기했어. 먹절골(남산계곡)이나 장골(대학로) 물가로 함지박 지고 간다니께. 괜히 나랏일에 대들었다가 경칠 것이여. 지금이 어느 세상이여. 이씨문중 세상 아녀.”

그 무렵 민가에선 디딤돌 방망이 소리가 뚝 그쳤고, 여인들은 뒷물을 하지 않았다. 청계천에 물이 찰랑찰랑 하여도 씻을 물이 없어서다. 다만 사대문 밖 물장수들만 신명이 났는데 아현과 만리현을 넘나드는 물장수들은 한강물을 져다 팔아 큰 이익을 챙겼다.

그 물장수 수천명을 부리는 화주는 이현박이라고 했으나 그 위세에 누구도 입도 뻥끗 못했다.

“녹조물 먹기 싫으면 생수 사서 마셔라”

애초 이현박은 준천을 하면서 청계천에 작은 화선(貨船)이 드나들 수 있게 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모두 입이 쩍 벌어질 역사였다. 이현박은 공조(工曹·건설관련 부처) 판서를 지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청계천 지천인 중화천으로 따라 올라가면 골 깊은 삼청골이 있는데 삼청골 민가 끝자락(현 감사원 자리)에 큰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가두고 이를 흘려보내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럴 듯했다.

이러한 그의 발상은 영조의 마음을 홀렸으나 소론과 사림들이 연일 광화문 앞에서 상소를 해대는 통해 무산됐다.

“전하, 한성판윤 이현박의 운하 건설은 천부당만부당하옵니다. 북악산이 높지 않아 그 골이 짧은데 어찌 그 많은 수량을 댈 수 있겠으며, 또 저수지 둑을 축조하려면 도성 백성이 다 동원돼야 하온데 수년째 가뭄으로 백성이 피폐가 말도 못하온데 장정들을 끌어 모아 역사를 시키기엔 불가하옵니다.”

지관들은 또 이렇게 상소했다.

“장대비라도 내려 둑이 터질 경우 경복궁과 북촌은 물바다가 되고 말 것이옵니다. 십오만 도성 백성 셋에 하나는 수장되고 마옵니다. 수신을 노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현박 판윤의 주장을 당장 내치시옵소서.”

청계천 개발로 상권을 잡아라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이현박은 시전 상인들을 내세워 관제 시위를 벌이게 했다. 종로통 미곡, 어물, 소금, 짚신, 비단 상인 등에게 금난전권(禁難廛權) 행사를 지속시켜 주겠다며 운하 반대파들을 압박했다.

금난전권이란 난전(소상공인 격)을 펼치는 이들에 대한 고발 권리를 갖는 것을 말한다. 나중엔 고발이 아니라 난전 행상 착취까지 이어졌다.

그래도 운하 반대 여론이 가라앉지 않자 시전 상인들은 철시 등을 통해 팔도에서 들어오는 행상들의 물품을 받지 않았다. 그 바람에 일반 백성의 먹거리, 입을거리가 끊겨 고통 받는 이들이 속출했다.

그 와중에도 싸전은 역질이 돈다는 이유로 마포나루에 내려진 뒤 적치된 쌀 유통을 거부하는 방법 등으로 쌀 수급을 조절,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그 싸전은 이씨문중 소유였다. 이씨문중 세도는 매점매석과 종로통 땅박기로 날로 부자가 되어 갔다.

게다가 대운하 공사를 통해 이씨문중 싸전을 열배 확장한다는 소문이 금세 퍼졌다.

청계천 빈민, 대거 쫓겨나 날품팔이 전락

하지만 갈수기와 홍수기 유량차이가 심해 청계천 운하 개발은 대참극을 부를 것이라는 도성 민심이 거세졌다. 그럼에도 이현박은 전과 달리 청계천 뱃놀이 보를 만들어 백성 모두가 시시때때로 뱃놀이를 즐길 수 있는 ‘무릉도원 한성’을 만들겠다며 우회했다.

좌당은 대운하로 가기 위한 하수에 불과하다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결국 이현박은 청계천변 빈민을 몰아내고 방민 십오 만여명, 고정(雇丁·날품팔이) 오만여명을 동원, 청계천 보 축조가 시작했다. 이 역사에 전 삼만오천 냥, 미 2300석이 투입됐다. 빈민 1만여 명은 강제노역을 해야 했다.

청계천 뒷골목에서 근근이 살아가던 개장수, 닭장수, 거간, 염색업자, 갖바치, 약국쟁이, 연희패 등은 졸지에 터전을 잃었다.

보가 완공되자 이현박은 마포나루와 한강진에 떠 있던 꽃놀이배를 수백 명을 동원, 광통교까지 가져와 띄었다. 청나라 사신들이 광통교 위에 호령하듯 자리 잡았다. 영조는 승정원의 뜻에 따라 잠재적 권력 이현박을 견제하느라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 연회엔 관영 시전 상인만이 백성 대표로 참석했을 뿐 아랫것들은 누구도 연회를 볼 수조차 없었다.

녹조라떼 위에서 뱃놀이

그리고 이태가 지나 이현박이 물러났다. 한해가 또 지난 어느 여름날이었다.

“웬 행렬이 이리 요란스러워.”

종로 피맛길로 뛰어 들어온 백성들이 너나없이 볼메어 있었다. 전 한성판윤 이현박의 행차로 종로 시전 여리꾼(요즘 포장마차 격)들이 행여 단속이라도 당할까봐 펼쳤던 보자기 물품을 그대로 싸안은 채 몸을 피한 것이다.

“저 양반이 날 덥다고 오간수문 앞으로 뱃놀이를 가신다네. 어이구 녹조 때문에 썩는 냄새가 장안에 꽉 차서 코 잡고 다니는 것도 모르고…어데 한 번 놀아보라지.”

그 무렵 청계천은 준천에도 불구하고 악취가 진동했다.

“대감, 연희패들도 준비해 놓았습니다. 제방마다 심어진 버들가지가 도성의 태평성대를 기뻐하듯 살랑살랑하옵니다. 오간수문 옆에 이간수문이 있고 그쪽에 훈련원이 있사온데 훈련원 지사 놈이 영일향교 출신이옵니다. 그 자는 이씨문중에서 특별히 미는 자옵니다. 이 자에게 시켜 훈련원 병사를 동원, 수문 물가에 늘어서도록 하라고 명해 놓았사옵니다. 볼만 할 것이옵니다.”

그렇게 시작된 뱃놀이는 해시(밤 9시~11시)가 되도록 끝날 줄 몰랐다.

“저것들 코는 역병이라도 들어 냄새를 맡지 못하는 거여 뭐여. 썩은 내 나는 녹색 시궁창에서 뭐하는겨. 상지랄이 따로 없네.”

청계천 썩은 물에 빠진 이현박

그렇게 수군거리는 백성들이 원성은 전모(선그라스 격)를 쓴 기생들의 간드러지는 웃음소리와 피리, 생황, 거문고, 장구 소리 등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한데 오간수문 가둔 물이 통 비가 오지 않아 수심이 얕아지면서 연회 배가 개흙처럼 되어버린 강바닥에 걸리는 일이 발생했다. 배 좌우가 휘청하면서 이현박이 자리한 곳으로 기생 수명과 악공 수명이 일시에 쏠렸다. 그리고 이현박과 함께 와르르 물속에 빠져 버렸다.

다행이 허리춤 밖에 되지 않아 목숨을 잃은 자는 없었다. 하지만 그 녹조를 뒤집어 쓴 이현박과 기생 등의 몰골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도깨비 꼴이었다. 강 둑에서 호위하던 훈련원 병사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이현박을 부축하고 강둑으로 걸어 나왔다.

이현박의 도포자락은 짙은 녹색이 됐고, 흑색 갓도 녹조류가 뒤덮어 생시에 볼 수 없는 형색이었다. 그 녹조도깨비 이현박 뒤로 전모 도깨비, 거문고 도깨비, 장구 도깨비, 생황 도깨비, 트레머리 도깨비 등이 흐느적흐느적 걸어 나왔다.

보름 달빛이 그들을 비추자 녹조류로 발라진 그네들 몸이 도깨비불처럼 빛을 냈다.

“뭣이여! 저것들이 뭐여! 역신이 도성에도 나타났네! 어서 피난가세. 어여 짐들싸!”

이를 본 몇몇 백성이 여기저기서 비명을 질렀다. 훈련원 병사들이 장막을 쳐 그들을 밀어냈으나 그 생시의 진풍경은 밤새 가가호호 퍼졌다.

역신 소식에 초가지붕 속에 살던 쥐들도 두려워하며 낙산과 남산 쪽으로 달아났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기자·시사소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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