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캠프에서 못다한 이지선씨 이야기 1 ‘사고로 온 몸에 중화상’

힐링캠프에서 못다한 이지선씨 이야기 1 ‘사고로 온 몸에 중화상’

기사승인 2013-09-10 11:22:01

[쿠키 문화] 이지선 씨가 9일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 다시 시청자들에게 희망과 감동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지선씨는 13년 전 불의의 교통사고로 전신 55%에 3도 중화상을 입었고 40번이 넘는 대수술과 재활치료를 받았다. 현재 미국 UCLA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사고 2년 후 2002년 12월 5~24일 국민일보에 게재했던 이지선 씨의 이야기([나의 길 나의 신앙] 교통사고 딛고 새인생 이지선씨)를 다시 소개한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재우 기자

*만취운전 사고 피해로 온 몸 중화상

<뉴스 광장> 만취운전 6중 추돌사고(2000.7.30)

앵커:“어젯밤 11시30분쯤 서울 한강로1가에서 서울 후암동 마흔두살 김모씨가 만취 상태에서 갤로퍼를 몰다가 마티즈 승용차 등 6대와 추돌했습니다. 이 사고로 마티즈 승용차에 불이 나서 차에 타고 있던 경기도 안양시 갈산동 23살 이모씨가 온몸에 2도의 중화상을 입고 인근 병원으로 긴급 후송됐습니다. 경찰 조사 결과 갤로퍼 승용차 운전자 김씨는 혈중 알코올 농도 0.35%의 만취 상태였습니다”

2000년 7월30일.

아무렇지도 않게 늘 남의 이야기로만 들어오던 뉴스속 ‘이모씨’가 되었습니다. 그 뉴스속 이모씨의 실제는 뉴스처럼 그렇게 짧지도 간단하지도 않았습니다. 돌이킬수 없는 3도의 중화상이 온몸에 남았고 죽음과의 싸움은 그 ‘긴급 후송’으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올해로 스물다섯살이 된 ‘이모씨’는 1978년 5월24일과 2000년 7월30일 2개의 생일을 가지고 있는 저 이지선입니다.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길에서,귀한 지면을 빌려 이제 겨우 시작한 제 길을,남보다 조금은 무거운 한 발자국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기쁨으로 뗀 그 한 발자국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그 엄청나고 무서운 불속에서 저를 건지신 하나님과 자기 팔을 태우면서 동생을 구해낸 오빠의 용감함과 사랑에 감사하며 이제 덤으로 사는 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공직에 계신 아버지와 사랑많은 어머니,많이도 싸우고 자랐지만 유별나게 친했던 세살 많은 오빠와 저 이렇게 네 식구가 사는 우리 집은 평범하지만 매우 단란한 가정이었습니다. 아빠의 전근지를 따라 부산 대전 대천 등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저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대학생이 되면서 경기도 안양 평촌신도시로 이사했고 학교가 가까웠던 오빠와 함께 작은 자동차를 타고 학교에 다녔습니다. 대학교 4학년이 돼서야 정말 하고 싶었던 공부를 찾았고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기 위해 여름방학에도 도서관에 다니며 준비했습니다.

제게 두번째 생일이 된,하마터면 사망일이 될 뻔했던 2000년 7월30일은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을 만큼 즐거웠던 가족 여름여행을 다녀온 바로 다음날이었습니다. 그날 주일예배를 마치고 오빠와 저는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참 이상한 날이었습니다. 공부를 하려고 앉았지만 오빠도 저도 왠지 집중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집에 갈까 말까,저녁을 먹을까 말까,만나서 같이 먹을까 말까…별 것도 아닌 일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시간만 흘렀습니다.

그리고 밤 10시10분 학교 후문에서 오빠를 만났습니다.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있는 날이면 늘 거기서,그 시간에 오빠를 만나 함께 차를 타고 집으로 오곤 했습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빠를 만나 차에 탔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날 이후로 아주 오랫동안 집에 돌아오지 못하게 됐습니다(그후로는 기억이 나질 않아 오빠에게 들은 이야기를 대신 씁니다)

용산쯤 와서 신호등이 바뀌어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었습니다. 오빠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뒤에서 “끼익” 하고 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러자 오빠가 “어디서 사고나는가 보다”하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 순간 이미 사고는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오빠 도움으로 화염속 기적같이 생존

신호에 걸려 정지해 있던 우리 차에 술을 마시고 이미 작은 사고를 내고 도망치던 갤로퍼 지프가 돌진해와서 충돌했습니다. 우리 차는 그 충격으로 앞차를 추돌하고 튕겨져나와 중앙선을 넘어 건너편에서 오던 차와 다시 충돌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차는 두바퀴 돌아 다시 그 갤로퍼에 쳐박혀버렸습니다. 오빠가 정신을 차린 것은 차가 빙글빙글 돌고있을 때였습니다. 머리 뒤쪽이 후끈하여 일어나 옆을 보니 조수석에 앉아 있던 내가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바로 안전벨트를 풀고 열려진 창문(오빠는 늘 창문을 열고 다녔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으로 어떻게 나왔는지도 모르게 순식간에 빠져나와 조수석 쪽으로 돌아왔습니다. 혹시 제가 그 옆으로 떨어졌는지 찾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그때 무심코 오빠가 차 뒤쪽을 보니 흰 양말을 신은 제 다리가 보였다고 합니다. 갤로퍼와 우리 차 사이에 다리가 걸쳐져 있었고 이미 제 상체는 불길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충돌과 함께 연료통이 터졌고 차가 몇 바퀴 돌면서 불이 붙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불 위로 떨어졌고 충돌로 인한 충격으로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오빠는 저를 꺼내려고 제 두 다리를 잡고 끌어당겼지만 움직이지 않아 제 상체를 위로 띄우듯 당겨서 저를 끄집어냈다고 합니다. 오빠는 불길에 휩싸인 저를 보고 급한 마음에 불을 끄려고 저를 껴안았습니다. 그때 오빠 팔에도 불이 붙었고 순식간에 피부가 타서 벗겨졌습니다. 그래서 오빠는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어 불을 껐다고 합니다. 불을 다 껐을 때쯤 한 택시기사 아저씨가 수건을 들고와 도와주었을 뿐 사고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때 “빨리 비켜요!차가 폭발해요!”라고 누군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오빠가 바삐 저를 안고 몇 발자국 옮겼을 때 우리 차가 폭발했습니다. 이 모든 일은 불과 1∼2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정말 모든 일이,엄청난 일이 ‘순간’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정신이 든 저는 오빠에게 “오빠,지금이 몇 년이야? 2000년이야?”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꿈이라고 생각되었나 봅니다. 무의식적으로 저는 꿈이라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말을 했다고 합니다. “오빠,나 이렇게 어떻게 살아. 나 죽여줘”

착한 오빠는 제가 아파서 고통받을 때마다 아마 이 말을 되뇌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괜한 짓을 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할 때도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내게 미안한 마음이 든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빠의 슬픈 눈에서,어쩔 때는 눈물을 참기 위해 웃는 그 슬픈 웃음에서 그런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얼마전 오빠와 함께 TV를 보는데 뮤직비디오에서 애인이 타고 있던 차에 불이 나자 밖에 있던 여자가 어찌할 바를 몰라 울부짖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걸 보던 오빠가 농담반 진담반으로 “저렇게 밖에서 보고만 있어야 되는건데 괜히 꺼내어 가지고 이 고생을 시킨다. 그렇지? 네가 발을 내밀고 있어서 그랬지.으이구∼”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에는 살맛 나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백번 잘 꺼냈지!”라고 대답했지요. 오빠가 참 좋아했습니다. 처음엔 저를 구해낸 것이 실수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실수가 아니었음을 우리 하나님께서 계속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미 제 안에서 시작하신 일을 끝까지 이루실 것으로 믿습니다. 이전의 저였으면 믿지 못할,다 이해하지 못할 평안을 맛보게 하시는 분,이 모습이라도 ‘행복’을 느끼게 하시는 분,이전보다 더 크고 풍성한 것들을 알게 하시고 느끼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소망합니다.

*중환자실서 지옥같은 죽음과 사투

앰뷸런스가 오고 저와 오빠는 사고 장소와 가까운 용산 중앙대부속병원 응급실로 이송됐습니다. 우리가 용산 전쟁기념관 옆 신호대기선에 선지 불과 5분도 지나지 않았지만 너무 많은 것이 변해 있었습니다. 더 이상 여느 때처럼 평화로운 주일 밤에 집으로 향하던 남매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응급실로 들어갔습니다. 의사들이 달려들었지만 별 방도가 없었습니다. 잠시 기절했던 저는 갑자기 일어나 뜨겁다며 치료해달라고 소리를 지르다 다시 정신을 잃었습니다. 의사들이 오빠의 팔을 치료하려고 하자 오빠는 자기는 괜찮다며 동생을 봐달라고 했지만 의사들은 동생은 지금 화상이 문제가 아니라 맥박조차 잡히지 않는다며 이곳에서는 더 이상 해줄 게 없어 화상전문병원으로 옮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제게 산소호흡기가 부착되고 우리는 다시 앰뷸런스를 타고 한강성심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앰뷸런스 안에서 오빠는 끝도 없이 주기도문만 외웠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때 오빠는 한강을 건너는 다리 위에서 저를 안고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했습니다. 오빠는 주기도문을 끊임없이 중얼거리다 제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선아 잘가. 너는 너무나 좋은 딸이었고 동생이었어. 누구보다도 예쁘고 착하게 살았고 평생 널 잊지 않을게. 먼저 하늘나라에 가서 조금만 기다려. 지선아,잘가” 오빠가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했을 때 저는 신음소리를 그쳤습니다.

한강성심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었습니다. 호흡조차 잡히지 않았고 뒤통수는 다 찢어져 살이 너덜거렸으며 이미 많은 양의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응급실에 살이 탄 냄새가 진동했고 얼굴도 새카맣게 타서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의사가 오빠에게 치료실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일지 모르니 동생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가라고 했습니다. 오빠가 다시 인사를 하자 저는 부르르 떨던 다리를 멈추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오빠의 인사를 받는 듯했다고 합니다.

잠시후 아빠와 엄마가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아빠가 “지선아,아빠다. 아빠가 왔어. 괜찮을 거야”라고 말하자 의식이 없다던 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고 합니다. 엄마는 어찌해야 할지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저를 보고 서 있을 수도 없었고 딸의 살이 탄 냄새를 맡고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 날 어찌할 바를 몰랐던,정말 앉을 수도 설 수도 없는 상황에서 엄마는 응급실 바닥에서 그냥 굴렀습니다. 너무 기가 막혀 눈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우리 지선이 교통사고 났어. 지선이 죽는대”라며 가깝게 지내는 권사님께 전화를 했고 곧 이모 삼촌 목사님 전도사님 권사님,그리고 집사님들이 병원으로 달려오셨습니다.

아빠는 여기저기 전화를 하시며 가망이 없어보이는 저를 위해 애쓰셨습니다. 제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아빠는 의식이 있다며 의사를 설득했습니다. 그래서 제 머리를 깎고 찢어진 뒤통수를 꿰매는 등 응급치료를 하고 온몸을 붕대로 감았습니다. 그렇게 겨우 CT촬영을 할 수 있었고 다행히 뇌는 다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새벽 4시 폐에 가스가 차서 그것을 빼내는 호스를 옆구리에 박고 저는 중환자실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아직 살았다고 할 수 없으며 아주 위험한 상태니 계속 지켜보자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지옥같은 죽음과의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이 때를 위한 믿음이라

새벽 6시. 사고소식을 듣고 전가화 목사님이 달려오셨습니다. 중환자실에 들어오셔서 엉망이 돼버린 저와 함께 기도를 하신 후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목사님은 한 20분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채 앉아 계셨습니다. 사선을 넘는 고난을 겪으셨던 목사님께서도 이 기가 막힌 상황에 차마 엄마를 위로할 수도 지선이가 괜찮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기도 어려우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목사님께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이 때를 위한 믿음이라,이 사건을 위한 믿음이라’.

“10년이 넘게 하나님을 믿어온 우리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하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그간의 신앙생활과 지금 가진 믿음이 이 어려운 때를 이겨나가기 위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을 당시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어려움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鄕嗤?우리 가족은 그럴 때마다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가 되었고 힘이 되었으며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제가 교회를 처음 다니게 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친구가 전도를 해서 아파트 상가에 있는 교회를 다녔는데 가족 모두가 다니지 않는 상황에서 매주 열심히 나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벼운 병인 줄로만 알고 입원하셨던 외할머니가 폐암말기라는 진단을 받게 됐습니다. 의사도 손쓸 수 없는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옆에서 간호하시던 이모할머니의 권유로 모든 가족들이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믿음생활이었습니다.

할머니는 많이 아주 많이 아팠습니다. 이미 병원에서도 포기한 상태로 퇴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좋아졌다가 나빠졌다를 반복했지만 6개월이 최고라는 의사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2년을 우리와 함께 더 계셨습니다.

실로암…아주 오래된 찬양이지요. 제가 처음 들은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할머니는 실로암 찬양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많이 불렀었지요. 그리고 기도원에서 잘은 못치지만 할머니 앞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이 찬양을 불러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날 정말 앙상하게 뼈밖에 안 남은 우리 할머니는 “우리 지선이 많이 예뻐졌네”라고 말씀하셨고 그것이 할머니와의 마지막 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할머니는 고단한 삶을 뒤로하고 정말 평안한 얼굴로 하나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그때는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왜 그렇게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할머니를 데려가셨는지…’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지난주 교회에서 이 찬양을 불렀습니다. 많이 울었습니다.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에 그리워서 흘린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감사해서…너무나 감사해서 눈물이 줄줄 흘러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울었습니다. 할머니는 정말 많이 아팠지만 우리 가족 모두의 실로암이었습니다.

실로암 그 연못에서 눈을 씻어 주님의 이름으로 소경이 눈을 떴던 것처럼 세상 가운데 하나님을 모르고 살던 우리 모두는 할머니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비로소 새로운 참 세상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너무 아팠지만 우리 가족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알려주고 떠난 할머니의 삶은 그 누구의 삶보다 귀한 것임을 압니다.

기도합니다. 부족한 저도,제 고난도 누군가에게 실로암이 되게 해달라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그 귀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도구로…저도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을 볼 수 있게 하는 주님의 실로암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사고가 난뒤 며칠동안은 전혀 기억이 없는데 지금도 뚜렷이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정신이 돌아올 무렵의 기억인 것 같습니다.어디선가 ‘웅’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고,빙글빙글 도는 것 같기도 하고,보이진 않지만 누군지 모를 여러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나를 지켜보는 것 같았습니다. 우습지만 저는 외계인에게 잡혀서 우주선을 타고 실험을 당하고 있는 것 처럼 느껴졌습니다.

“이게 뭐지? 꿈인가? 자고 있나? 이게 뭐지?”

그러다가 “누가 구급차좀 불러주세요! 지선아 괜찮아,괜찮을 거야”라는 너무나 다급하게 울부짖는 오빠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습니다. 시끄럽고 정신없는 사고 현장의 소리가…. 그 끔찍한 소리만이 제 머릿속에 계속 떠올랐습니다. 뭔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꿈이 아닌 일이, 내게 뭔가 아주 큰일이 일어난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고구나. 사고가 났구나. 내가 다친 건가봐” 그때 그 기분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너무 당황스럽고 무서운 그 기분. 무섭다는 말 한마디로는 표현이 안되는 느낌…. 공포였습니다.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지나온 것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죽으려고 했습니다. 얼마나 다쳤는지도 모르고 정신도 혼미할 때였는데 어떻게 그런 못된 생각까지 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산소호흡기로 목을 눌러 산소가 들어오지 못 하게 해보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될리가 없었지요. 그래서 몸에 어떤 줄이 달려 있길래 그걸 뽑으면 죽게 될까 싶어서 발가락으로 당겨서 뺀 것이 나중에 알고보니 겨우 소변을 받아내는 줄이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우스운 존재인지요.

이렇게 내 힘으로는 모든 것이 불가능하자 가스펠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뒤에 가사는 생각지도 않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고 싶다고 그렇게 천국으로,하나님께로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부르고 또 부르며 정신이 있는 동안은 계속 불렀습니다. 너무 무서워서,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하나님께 가고 싶다고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제가 찬양을 하고 있을 때 믿음의 집 식구들과 시온성가대,또 사랑하는 가족들의 간절한 기도가,뿌려진 눈물이,안타까운 마음들이 하늘 보좌를 흔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끊임없이 불렀던 찬양 가사처럼 고통 가운데 주님을 만나 이렇게 살아서 찬양과 감사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을 느끼고,전하고,증거하며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라고 하나님은 제게 그런 계획이 있으셨나 봅니다.

정리=김병철기자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추천기사
많이 본 기사
오피니언
실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