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캠프에서 못다한 이지선씨 이야기 2 ‘양쪽 손 절단’ 말듣고 깜짝 놀라

힐링캠프에서 못다한 이지선씨 이야기 2 ‘양쪽 손 절단’ 말듣고 깜짝 놀라

기사승인 2013-09-10 11:25:02

[쿠키 문화] 이지선 씨가 9일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 다시 시청자들에게 희망과 감동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지선씨는 13년 전 불의의 교통사고로 전신 55%에 3도 중화상을 입었고 40번이 넘는 대수술과 재활치료를 받았다. 현재 미국 UCLA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사고 2년 후 2002년 12월 5~24일 국민일보에 게재했던 이지선 씨의 이야기를 다시 소개한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재우 기자

*병원서 생존 어려운 환자로 분류

사고후 며칠간 저는 의식이 있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했습니다. 타버린 몸이 부어오르기 시작해 눈,코,입까지 부어올라 정말 쳐다보기 어려울 만큼 흉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면회시간에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때는 온몸이 부어올라 볼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움직이지 못하게 손발을 묶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엄마가 발을 묶은 끈을 풀어주어 발로 글씨를 썼습니다.

“여기 어디?” “병원이야,중환자실이야. 지선이가 다쳤어…” “언제 만나?” 엄마와의 첫 대화는 그랬습니다.

그전에 친척 한 분이 중환자실에 계셨던 적이 있어서 중환자실은 면회가 제한돼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한 것 같았습니다. 엄마는 하루에 세 번, 30분씩 만날 수 있었습니다. 면회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었고 정작 엄마를 만나는 시간은 너무 짧아서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는 것이 중환자실에서 있는 동안 화상 치료만큼이나 힘들었습니다.

또 가족에게는 제 생명만큼이나 중요한 문제가 한 가지 더 있었습니다. 저는 사고 당시 눈에 콘택트 렌즈를 끼고 있었습니다. 얼굴이 까맣게 타버렸는데 눈 안에서 렌즈가 녹아버린 것은 아닐까? 정말 그렇다면 이젠 지선이가 살아도 앞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닐까? 온 가족이 걱정했습니다.

몸이 퉁퉁 부어있었기 때문에 렌즈가 녹았는지 확인할 수 없는 며칠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사고가 일어난지 4일째 되던 날 부기가 조금 가라앉으면서 전혀 녹지 않은 렌즈를 꺼낼 수 있었고 그것을 간호사가 엄마에게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제 눈을 지켜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렸습니다.

심한 화상의 경우 대개 1주일이 생사의 갈림길이라고 합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병원에서는 저를 살 가망이 없는 환자로 분류하여 간호 스테이션에서 가장 가까운 침대에 두었습니다. 제가 2층 중환자실에 있던 40일간 그 침대에 있었던 환자 중에 살아서 나온 사람은 저 하나였습니다.

1주일이 생사의 고비라는 그동안 폐에 차 있던 가스를 제거하는 관도 빼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의사 선생님이 제 가슴을 두드리며 “이제 숨쉴 수 있지? 혼자서 숨쉴 수 있지?”라고 물으셨고 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목안 깊숙이 박혀있던 산소 튜브를 뽑아내었습니다. 그때의 시원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엄마와 말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다 나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살기 위한,살아남기 위한 싸움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었습니다.

매일 아침 지옥같은 화상치료실에서의 치료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타버린 피부조직을 긁어내는 수술조차 금방 해주지 않았을 만큼 여전히 저는 살 가망이 희박한 환자였습니다. 그러나 저를 위해 눈물로,금식으로 기도해주셨던 정말 많은 분들의 사랑의 힘이 있었고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를 죽음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이곳에서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살며 제게 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글로 전하고 있습니다.

*극심한 수술고통…찬양으로 극복

저는 계속 헛것을 보았습니다. 누워있는 그곳이 병원으로 제대로 보이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수술을 하면 안 아프게 될 줄 알고, 또 수술을 하면 이제 중환자실을 나가게 될 줄 알고, 그렇게 기다리던 첫번째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 수술은 타버린 피부와 죽은조직을 긁어내는 수술이었습니다. 애타는 마음으로 뭔가 더 좋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부모님은 수술실 앞에서 의사의 입으로부터 설사 살게 되더라도 사람 꼴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손가락도 다 절단해야 한다는, 너무나 냉정한 현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기절했고, 저는 고통가운데 소리를 지르며 비린내가 진동하는 몸으로 수술실에서 다시 중환자실로 옮겨졌습니다.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죽은 조직을 걷어내니 치료는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매일 아침 제가 받아야 했던 화상치료는 감겨있는 붕대가 잘 떼어지도록 물로 적시고, 가위로 서걱서걱 잘라내고, 모든 상처부위를 소독 물로 씻어냅니다. 약이 잘 발라지도록 물기를 또 닦아냅니다. 정말 고통스러운 시간입니다. 그 위에 다시 약을 바르고 붕대를 다시 감는 것으로 치료가 끝이 납니다. 말은 이렇게 몇 줄의 설명으로 끝나지만, 피부의 55%가 없었던 그 당시 제가 느꼈던 고통은 아주 오랫동안 눈물 없이는 떠올릴 수 없는, 생각만으로도 모든 세포가 벌벌 떨리는, 그런 기억입니다. 그 곳은 정말 생지옥이었습니다. 어이없게 다친 사람들이,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비명을 지르는, 실제로 마약으로 분류되기도 하는 강한 진통제를 맞고도, 그냥 차라리 거기서 딱 미쳐버렸으면, 차라리 정신을 잃어버렸으면 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나 돼지의 마음이 이럴 꺼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철저히 혼자가 되는 시간마다 저를 지켜준 것은 찬양이었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 죽어야 했지만 그 죽음과 같은 시간을 기다리며 마음을 졸이며 끊임없이 찬양을 들었습니다. 저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찬양 속엔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힘이 있었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 놀라지 말라”.

모두가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는 그곳에서 저는 단 한번도 소리 질러 본 적이 없습니다. 치료를 하던 치료사들이 “지선이가 베스트”라며 칭찬을 할 정도로 저는 이를 악물고 참았습니다. 발가벗겨져, 피부도 없이 그곳에 누워, 소리마저 질러버린다면 정말 저조차도 제 자신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하라는 대로 저는 매일 치료 받는 동안 기도했습니다. “지금 하는 치료가 감염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소독일 뿐이지만,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 믿음으로 몸을 담구었던 것처럼, 이것이 헛되지 않게 하시고, 저를 하나님께서 치료하시옵소서”.

아팠던 이야기를 하자면 이 지면을 다 써도 다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 모든 고통은 하나님만 기억하시길 원합니다.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뿌려졌던 눈물과 피와 고통의 기억들은 나를 구원하실 여호와 하나님만 기억하시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다만 제가 경험했던 그 곳은 ‘끝이 있는 지옥’이었음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끝이 있는 지옥은 차라리 축복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삶이 끝나 천국에 갈 때에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이 떨어지게 될 그곳은 ‘끝이 없는 고통의 지옥’이라는 것을 더욱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하기 원합니다.

또한 잊을 수 없는 것은 매일 아침 새벽기도를 마치고 한걸음에 달려오시는 김순호 목사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밤새 헛것을 보고, 1시간 조차 잠들지 못한 제게 목사님은 아침마다 시편의 말씀을 읽어주셨습니다. 그것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퍼지는 하나님의 음성이었고 위로였고 선포였습니다.

*“살아야 겠다”…악착같이 먹어

시간이 얼마간 지나고 치료실에서 뒤통수를 꿰매었던 부분의 실을 뽑아내느라고 저를 일으켜 앉혔는데 그때 제 눈으로 제 다리의 상처를 보게 됐습니다. 붉은 생살과 피,그리고 생닭에서나 봤던 노란 지방덩어리와 하얀 뼈까지….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그저 “나는 살지 못하겠구나…”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다음날 밥을 먹이시는 엄마에게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엄마에게도 마음의 준비를 시켜야 할 것 같았습니다. 더 이상 무언가를 먹는다는 게 의미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엄마는 그럴수록 더 먹어야 한다고,다음부터는 절대로 상처를 보지 않기로 약속하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한 숟갈 한 숟갈 떠먹일 때마다 기도를 하셨습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에 살을 입히시고 가죽을 덮으시고 생기의 영을 불어넣으시는 하나님,이것이 지선이의 살이 되게 하시고 피부가 되게 하시옵소서”

저는 열심히 먹었습니다. 제가 거기서 그런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습니다. 면회시간이 끝난 뒤에도 계속 먹어야 한다고,많이 먹어야 빨리 살이 차올라서 이곳을 나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쁜 간호사님들의 온갖 눈치를 받았지만 저는 죽을 힘을 다해 먹었습니다.

밤마다 양 옆 침대에 누운 다른 환자들이 혼수상태에 빠지고,긴급상황이 벌어지고,죽어 나가는 상황에서도,커튼 뒤로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그 순간에도 저는 계속 먹었습니다. 마음이 약해질 수 없었습니다. 나는 살아서 나가야 했습니다. 이렇게 그만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저를 만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중환자실 문앞에 와서 기도하고 가시는 수많은 분들의 눈물과 기도에 보답하는 길이었습니다.

실제로 빠른 속도로 살이 차올랐고 그곳에서 두번째 수술인 피부이식 수술(양팔,오른쪽배,허벅지)을 받고 36일만에 중환자실에서 준중환자실로 옮겨졌습니다. 36일동안 그 중환자실에서 18명의 환자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생명은 누구에게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데 저를 살아서 그곳을 나오게 하신 하나님의 사명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제가 전우라고 부르는그분들(중환자실은 실제로 전쟁터였습니다)을 생각해서라도 저는 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내기 원합니다.

머리부터 온몸이 미라처럼 붕대로 감긴 저는 그곳에서 더 이상 여자도,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누구보다 보호받아야 할 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거기 누워 바쁜 의료진을 이해해줘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토록 감염 위험 때문에 가족과 만나는 면회시간도 제한시키면서 너무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병실 안에는 벌레가 날아다녔습니다.

이미 그때부터 제 눈은 감기지 않았었고 피부가 없는 얼굴에서 계속 진물이 흘러서 눈은 언제나 뿌옇게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날아다니던 벌레가 내 눈에 내려앉았고 정말 손가락하나 까딱할 수 없는 저는,눈 한번 깜짝 할 수 없는 저는 누군가 와서 쫓아주기 전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벌레 하나 쫓을 수 없는 나…. 많이 비참했습니다. 7개월 뒤 눈을 감을 수 있게 되기까지 저는 아주 오랫동안 날아다니는 벌레만 나타나면 벌레를 쫓아달라고 소리를 지르곤 하였습니다.

9월21일 세번째 이식수술을 위해 피부를 얇게 떼어내고 붙일 부분을 고르게 하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저는 제가 지르는 비명소리에 마취에서 깨어나 “엄마 아파∼ 아파∼”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렇게 이를 악물고 참던 저도 별 수 없었습니다. 찬양 테이프를 틀어달라고 했습니다.

‘왕이신 하나님 높임을 받으소서’라는 찬양이 나오고 울부짖던 제 소리도 찬양으로 바뀌었습니다. 울면서 따라 불렀습니다. 나를 지키실 분,나를 건지실 단 한 분. 만왕의 왕 되신,천지의 주재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양쪽 손 절단’ 말듣고 깜짝 놀라

사고 후 두달만인 9월28일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일반 병실로 옮겼습니다. 여전히 많은 상처가 있었고 얼굴은 그대로 피부없이 나오긴 했지만 이제 오랜 시간 그렇게 그리워했던 가족을 마음껏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마음껏 찬양을 들으며 기도받을 수 있고 예배 드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일반 병실로 옮겨진 뒤 누울 곳도 제대로 없었는데 네 식구가 3일동안 한 병실에서 잤습니다. 너무 좋아서,너무 감사해서 제가 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얼굴에 피부이식을 받기 위해 성형외과로 옮겼지만 계속적인 의료 분쟁 사태로 의사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고 어쩌다 그렇게 어렵게 만난 의사는 자신의 피곤함을 저와 가족에게 퍼부어댔습니다. 이미 바닥이었던 우리를 땅속 끝까지 밀어넣는 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병원을 옮겼으나 의료파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병원에 의사가 없다는 이유로 수술은 계속 미뤄졌고 이식했던 상처들까지 다시 녹아버려 더 큰 상처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파업이 끝나고 의사들은 돌아왔지만 얼굴을 덮을 만한 피부가 여유롭지 못하다며 수술은 또 다시 기약없이 연기됐습니다.

12월7일 병원을 옮긴 지 두달만에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양손 엄지를 제외한 손가락 모두 한마디 정도를 절단하기로 한다는 ‘절단동의서’를 쓰고 말입니다. 그때 오빠가 들고 온 종이에 지장을 찍으면서도 저는 그게 절단동의서인줄 몰랐습니다. 수술실에 들어가면서 간호사가 “양손 절단동의서 확인하셨죠?”라고 하는 말을 듣고 엄마에게 놀라 물었습니다. 그때까지 오른쪽 손가락만 절단하는 줄 알았거든요.

“왼쪽도 하는 거야?”“응”

그리고 잠시 후 하나님께서 제 입술에 어떤 말을 주셨는지 아세요? “엄마,더 많이 자르지 않아서 감사해야지” 제 마음은 처음부터 제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은 줄 수도,알 수도 없는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었습니다.

뼈까지 완전히 타버려서 도저히 살릴 방법이 없기 때문에 손가락을 절단해야 한다는 마지막 결정을 들은 날 밤 저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손가락은 짧아지더라도 손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당시 팔에 이식한 피부가 땅겨 제 힘으로는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의수보다 못한 손이 되지 않게,부끄러운 손이 되지 않게,제 힘으로 움직일 수 있는 손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지금 제 왼손은 새끼손가락을 제외하곤 거의 정상입니다. 왼손은 오른손보다 손가락도 조금길게 남았고 많이 상하지 않아서 저는 이제 왼손잡이가 되었습니다. 왼손이 오른손 같지 않음을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오른손도 왼손처럼 편하게 될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이 부끄러운 손을 기쁘게 사용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이 부끄러운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께 찬양합니다. 이 손으로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악수도 하고 손을 흔들며 인사도 합니다. 그리고 엄지로만 치고 있지만 이 손으로 이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하는 글을 씁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불쌍한 손이지만 하나님은 제게 이 손이 부끄럽지 않다는 마음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제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제 손을 부끄러운 손이 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정리=김병철기자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추천기사
많이 본 기사
오피니언
실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