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채윤의 뮤직에세이(9)] 글렌 굴드 '골드베르크 변주곡 G장조 아리아'

[한채윤의 뮤직에세이(9)] 글렌 굴드 '골드베르크 변주곡 G장조 아리아'

기사승인 2013-09-19 10:40:01

[한채윤의 뮤직에세이(9)] 글렌 굴드 '골드베르크 변주곡 G장조 아리아'

지독한 여름이었다. 내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더 높이 올라가지 않으면, 무언가 끊임없이 하지 않으면 곧 불안을 느끼지만 가끔은 잘 견뎌낸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칭찬하고 싶은 그런 날들이 있다. 이번 여름이 그랬다.

차에 시동을 걸자 익숙한 멜로디가 귀에 감겼다. 뭐였더라? 제목이 바로 떠오르지 않아 곡이 끝날 때 까지 시트에 몸을 뉘였다. 글렌 굴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G장조 아리아. 또박또박 발음해주는 그녀의 목소리에 안도하며 집으로 향했다.

잠들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너무 더워서라는 핑계를 대며 불면의 밤을 흘려보냈다. 딱히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로. 아니, 하지 못한 채로.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잠들지 못하는 어느 귀족을 위해 특별히 쓰여 진 곡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아침, 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뒤였다.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다

“글을 통 못 쓰겠어요.”

“몸이 안 좋거나 생각이 많으면 그래요. 부담 갖지 말고 쉬어요. 글보다 사람이 먼저니까.”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지만 사실은 생각이 많았다. 진심이 아니면 노래 할 수 없고, 진실이 아니면 쓸 수가 없다.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무기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도 한다. 거짓말은 도무지 할 수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맨 처음으로 돌아가 본다. 막막한 순간은 언제고 있어왔다. 한때는 제자리에 앉아 울기만 했고 어떤 날은 어떻게든 나아가려 온 몸이 부서져라 부딪쳐도 보았다. 늘 결국에는 시간이 해결해 주었고 답은 나에게 없었다. 경험을 통해 배워 이제는 무리하지 않는다. 느긋하게 기다릴 줄 도 알게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제자리에 앉아 울기만 하던 그 날들, 깨어있는 시간에는 항상 라디오를 켜두었다. 매일을 예외 없이. 두어 달 듣다 보니 말이 많은 채널은 피하게 되더라. 하루에도 몇 번이나 위로를 전하는 목소리에 거부감이 들었다. 위로 받는 다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나의 무능을 절실히 깨닫게 했다. 어느 날인가부터 라디오 주파수는 클래식 채널에 고정 되었다.

습관적으로 라디오를 켜고 종일 듣다보니 외우려 하지 않아도 기억에 남는 단어들이 하나씩 늘어갔다. 글렌 굴드가 그랬고 하프시코드가 그랬다. 바흐는 예외 없이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라고 이름 전체가 또박또박 불려 졌고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의 유명세에 비해 드뷔시나 드보르작, 브람스가 더 빈번하게 들렸다. 클래식은 어렵지만 듣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딱히 음악 공부라 할 만한 공부를 한 적이 없다. 취미로 기타를 배우며 코드를 알았고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궁금해 하며 곡을 썼다. 지금은 노래를 짓고 앨범을 만들고 음악 하는 사람으로서 글을 쓴다. 3년 동안 하루 10시간씩 들었다고 계산하면 일만 시간이 된다. 그거 말고는 대체 어떻게 곡을 쓸 줄 알게 된 건지 나 자신도 전혀 모르겠다.

등을 기대고 가만히 앉아

벽을 허물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부딪치는 것도 좋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편도 나쁘지 않다. 누군가 대신 부수거나 벽이 저절로 무너질 때 까지 기다리는 것, 그 시간들을 잘 견뎌내는 것도 방법이다. 어떤 벽은 혼자 힘으로 쓰러뜨릴 수 없다. 절대로. 벽을 등지고 다른 길을 찾아 나서는 것도 방법이 될 테지만 분명 또 다른 벽을 만날 것이다. 언제까지고 헤매기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벽이 없는 길은 없다.

할 수 있는 일들을 떠올려 본다. 순서대로 하나씩 해나간다. 마지막 키를 사용 했음에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거기까지이다. 억지를 부리면 열쇠 구멍이 망가져 키를 가진 사람이 나타나더라도 문을 열 수가 없게 된다. 시간이 지나 반대편 손잡이가 돌아가 저절로 열릴 수도 있다.

벽에 기대어 음악을 듣거나 노래를 부르자. 그 날이 오면 더 멀리 달릴 수 있도록 힘을 아껴두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기다린다는 건, 그 시간들을 온전히 견뎌 낸다는 건, 자신을 혹사시키는 것 보다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인 지도 모르겠다.

슬프지만, 고통스럽겠지만, 속상하고 우울하겠지만 버텨보자. 고개를 들어 눈앞에 벽이 아닌 하늘을 보며 숨을 고르자. 죽기 살기로 너무 열심히 하지 않아도 괜찮다. 누군가 내게 해주었던, 글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말처럼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당신이 가장 소중하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 계속 된다면 골드베르크 변주곡 G장조 아리아를 들어보시길. 수백 년 전 우리의 상상으로는 남부러울 게 없을 것 같던 어느 귀족도 쉬 잠들지 못해 이 곡에 의존했다고 하니까.

그 여름의 더위가 벌써 아득하게 느껴진다. 얼마나 지났다고.

한채윤 / 배우 & 싱어송라이터 서강대학교 영미어문 졸업. 오랫동안 잘 안 팔리는 배우로 지내면서 넘쳐나는 시간 동안 기타도 배우고 피아노도, 노래도 배우다가 이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 해서 어느 날부터인가 곡을 쓰기 시작. 지난 3월 자작곡 미니앨범 '한채윤 첫 번째_너무 흔한 이야기' 발매. 여러 편의 단편 영화와 작은 역할로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 대표작으로는 뮤지컬 '심야식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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