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논다.
동물과 식물 가림 없이 제 나름의 방식으로 반응하고 움직이고 소통하면서 논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논다는 것은 ‘존재의 고유한 운동양식’일 수도 있다.
뱃속의 태아도 살아 있는 생명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엄마의 자궁벽을 두드리며 놀고, 태어나 부모와 소통을 갈구하며 옹알이를 하고 作作宮作作宮(짝짝궁짝짝궁) 손뼉을 치며 세계와 소통을 시도한다.
네덜란드의 문화역사가인 요안 호이징아(Johan Huizinga)는 인간을 호모루덴스(homo ludens), 즉 ‘놀이하는 인간’이라고 칭하였다. 놀이의 시작은 인류문화의 시작과 궤를 같이 하며 놀이 속에서 문화가 탄생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결국 인간의 본성으로서 놀이를 바라보는 것이다.
민족문화백과사전에 보면 놀이란 ‘인간의 생존과 관련이 있는 활동과 ‘일’에 해당되는 활동을 제외한 모든 신체적·정신적 활동. 자고 먹는 활동은 인간의 직접적인 생존활동이다.’고 규정하고 있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의 성립으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의 시대가 오면서 일과 놀이가 분리되었지만 혈연중심의 원시공동체 사회에서의 놀이는 일과 분리되지 않은 원시종합예술이었다.
공동으로 노동하고 단일한 신앙체계를 가지며 함께 유희하는 공동체사회, 다시 말해 일과 놀이, 제의의식과 축제, 유희와 학습, 창작과 표현 등이 구분 없이 통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일타미라벽화, 반구대 암각화 등 원시공동체유물 등에서 쉽게 발견되며, 초기 유대교 소부족 공동체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구약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원시공동체는 수직적 지배구조가 존재하지 않아 누구나 참여하고 유희하는 대동놀이 형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일과 놀이를 따로 구분하지 않는 시대, 즉 ‘놀이공동체시대’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농악과 들노래 등 노동과 집단적 유희가 함께 공존하는 놀이방식이 공동체성이 강한 농촌에서 유지?전승되고, 산업화로 인해 농촌공동체가 붕괴되면서 놀이문화가 쇠퇴하고 소멸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잉여 생산물과 더불어 잉여시간을 둘러싼 본격적인 대립의 시대가 오면서 지배 권력은 의도적으로 ‘노는 것은 게으르고 나태한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전파시키고 놀이를 일과 분리시키고 본인들이 독점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피지배의 역사 속에서도 끊임없이 놀이를 만들고 놀이를 통해 스스로의 해방의 공간들을 영위하고 확대해 갔다.
현대사회가 디지털화 될수록 인간의 지향이 아날로그를 지향하는 것처럼 미래사회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오가며 다시 놀이와 일을 일치시키는 것에 대한 인간의 욕구와 지향들이 더욱 확대되는 쪽으로 전개될 것이다. 왜냐면 일과 놀이의 일치는 인간의 본성적 욕구이기 때문이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정창교 기자 jcgy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