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관리소 싸움에 등터지는 경비원들
가을비가 내리던 15일 오후 서울 월계동의 한 아파트단지. 불 꺼진 경비실에서 경비원 A씨(69)가 흰 종이에 또박또박 사직서를 적어내려 가고 있었다. 그는 “겨우 한 달 반 일했다. 일흔 가까운 나이에 새 직장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A씨가 고령에 어렵게 얻은 새 직장을 그만두기로 한 건 밀린 월급 때문이다. 월 129만원을 받기로 했지만 아직 월급을 손에 쥐어보지 못했다. 그는 “고된 경비 일을 열심히 해도 월급이 언제 들어올지 까마득하다”며 “어렵겠지만 다른 일을 찾으려 한다”고 말했다. 사직서 곁에 놓인 종이컵 속엔 담배꽁초가 가득했다.
A씨의 동갑내기 동료 B씨는 2007년부터 이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했다. 27일이면 10월 월급이 들어와야 하지만 그 역시 지난달 월급조차 구경을 못했다. 생활비를 돌려 막는 카드 빚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지고 있다. 다른 동료들은 “월급이 언제 나올지 모르니 새 직장을 구하겠다”며 하나둘 떠나는데 일흔이 다 된 그는 새로 취업할 자신이 없어 그저 기다리고 있다. B씨는 “경기가 어려워지자 쉰밖에 안 된 젊은 사람들도 경비 일에 몰린다”며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점점 갈 곳이 없어져 함부로 그만두지 못한다”고 말했다.
결국 이들은 ‘칠십 평생’ 처음으로 14∼15일 피켓을 들고 아파트 정문 앞에서 체불임금 지급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월급이 밀린 건 입주자대표회장과 동대표들 그리고 관리사무소 사이의 갈등 탓이다. 지난 3월 동대표 회의 직후 있었던 물리적 충돌이 발단이 됐다. 동대표들은 입주자대표회장 박모씨의 행동을 문제 삼아 지난달 중순 투표로 박씨를 해임했다. 박씨는 절차상 문제가 있다며 법원에 해임투표 효력정지 가처분소송을 냈다.
경비원들이 월급을 받으려면 급여지출통장 직인을 갖고 있는 박씨의 결재가 필요하다. 관리사무소 측은 박씨에게 “해임됐으니 도장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박씨는 “도장을 찍을 테니 내 권한을 인정하라”며 결재를 미루고 있다. 박씨는 지난달 13일 근로기준법과 최저임금법 위반 혐의 등으로 약식 기소됐고, 직원과 주민 2385명은 박씨 해임이 정당하다며 법원에 탄원서를 제출한 상태다.
그 사이 관리사무소 직원 77명 중 소장을 포함한 47명이 월급을 받지 못했다. 나머지 30명은 용역 업체 소속 청소미화원이다. 체불월급 총액은 약 8000만원. 여기에 상여금과 기타 비용 3470만원을 더하면 1억원이 넘는다. 7·8월 월급도 지난달 중순에야 지급됐다. 경비원 월급은 최저 시급에도 미치지 못한다. ‘감시 단속직 근로자’에 해당하는 이들은 올 시간당 최저임금 4374원을 받아야 하지만 계약금액은 4122원으로 동결된 상태다.
14∼15일 아파트 정문에서 노인 경비원들의 집회가 열리기 전까지 대다수 주민은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다. 주민들에게 불편을 끼치기 싫었던 경비원들은 그동안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들이 했던 ‘항의’는 부재중 택배 수령 업무를 잠시 중단한 것뿐이었다.
경비원 집회로 주민 불편이 우려됐지만 일부 주민은 “힘을 내 더 완강하게 하시라”고 응원했다. 이 아파트에서 2년째 살고 있다는 주부 윤모(38·여)씨는 “정문에서 집회를 하기 전까진 자세한 상황을 몰랐다”며 “힘든 일 하시는 아저씨들이 월급도 제대로 못 받고 계셨다니 안타깝다”고 말했다.
전수민 기자 suminis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