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채윤의 뮤직에세이(10)] '시월의 하늘', 외로움 그리고 그리움
엄지발가락이 욱신거린다. 왜 이러지? 눈에 보이는 이상은 없는데 모르는 사이 어딘가에 부딪힌 모양이다. 며칠을 그렇게 신경이 쓰이더니 어느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샤워를 하다 엄지발가락에만 페디큐어를 바른 것처럼 짙은 회색이 도는 걸 발견했다. 눈에 보이지 않던 통증이 멍 자국을 남기고 사라졌구나. 겉으로 보기에만 심각해 보일 뿐 더 이상은 전혀 아프지 않았다.
커튼을 열면 연일 높고 푸른 하늘에 기분이 좋다. 하얀 구름이 여유를 부리며 흐르고 찰나의 순간 비행기가 사이를 가른다. 창으로 하늘을 보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산으로 들로, 날씨도 좋고 바람도 좋은 가을 날.
무엇이든 해도 좋다는 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과 같다. 함께 할 사람이 없다는 건 뭐든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뜻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그리고 노래를 부른다.
시월의 하늘
파란 하늘에 눈이 부셔 눈물이 나
기억하는 건 사소했던 그 다정함
오래지않아 잊을 거란 어린 생각
후회하는 건 늦은 거란 이른 단정
기억을 더듬는다. 이제는 멍이 들었던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을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아파했던 건 기억나지만 얼마만큼 아팠는지 기억에 없다. 관계가 나빠져 이별을 했는데 헤어지고 나서는 좋은 날들만 떠올라 많이 울었더랬다. 헤어져야 하는 커다란 이유가 함께 했던 소소한 행복에 가려져 그렇게 서러울 수 가 없었다. 당장 헤어지고 나서는 그랬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 그게 뭐든. 차분히 기다리면 될 일이지만 감정이라는 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는 법. 곁에서 들어주던 사람들이 있었다. 힘든 시간을 지나 보내며 돈독해진 사이들. 잃는 게 있으면 반드시 얻는 것도 있다는 걸. 너를 잃고 더 많은 걸 얻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일(1)도 아닌 영(0)
외로움 그리고 그리움 그대를 향한 낮은 목소리
눈부신 시월의 하늘은 바람을 실어 위로 하네
멍이 들면 통증이 줄어든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겉으로 드러나면 덜 아프다. 보이지 않는다면 보여주는 것도 방법이 되지 않을까 싶다. 애써 감춰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혼자서 끙끙 앓기보다 바람 같은 사람들과 아픔을 나누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공감해 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새로운 관계가 시작 될 수도 있다. 그 결과가 사랑이던 우정이던.
가을은 확실히 이별하기에 좋은 계절은 아니다. 혼자여도 이렇게나 외로운데. 숫자 일도 아닌 영. 돌아보면 나와 하나였던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나도 없었다. 다시 나를 찾고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려면... 생각만으로도 어렵다. 하긴, 이별해도 괜찮은 계절이라는 게 어디 있을까?
당신 혹시 지금 이별했다면, 건투를 빈다. 이 계절이 다 가기 전에. 오늘도 하늘이 참 맑다.
시린 바람에 마음 한켠 서늘해져
기억하는 건 서툴었던 그의 진심
괜찮을 거라 토닥토닥 날 다독여
무너지는 건 함께 웃던 그 날 우리
외로움 그리고 그리움 그대를 향한 낮은 목소리
눈부신 시월의 하늘은 바람을 실어 위로 하네
(시월의 하늘, 2013)
한채윤 / 배우 & 싱어송라이터
서강대학교 영미어문 졸업. 오랫동안 잘 안 팔리는 배우로 지내면서 넘쳐나는 시간 동안 기타도 배우고 피아노도, 노래도 배우다가 이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 해서 어느 날부터인가 곡을 쓰기 시작. 지난 3월 자작곡 미니앨범 ‘한채윤 첫 번째 너무 흔한 이야기’ 발매. 여러 편의 단편 영화와 작은 역할로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 대표작으로는 뮤지컬 '심야식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