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문화] “겨울 조끼 없어요, 조끼?” “아, 몰라. 아가씨가 직접 찾아봐.”
“입어보고 싶은데 혹시 거울 없나요?”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냥 눈대중으로 사는 거지.”
던지는 질문마다 면박이 돌아왔다. 무릎 높이까지 수북이 쌓인 옷더미를 몇 번이나 뒤집은 끝에 마음에 드는 겨울 코트를 하나 찾아냈지만 구매 결심까지는 오래 걸렸다. 옷태를 살필 거울은 물론이고 “잘 어울리시네요”라는 흔한 칭찬 한마디가 없어 망설임이 길어졌다. 그렇게 코트를 집었다 내려놓기를 수차례. 코트 가격으로 “한 장이면 된다”는 주인의 제안에 얼른 지갑을 열었다. 올 겨울 트렌드라는 빨강색 체크무늬 구제 코트의 가격은 단돈 5000원. 코트의 브랜드를 감안할 때 원래 가격의 40분의 1, 거저라고 해도 좋을 가격이다. 다른 옷들의 가격도 웬만하면 5000원을 넘지 않았다. 정장재킷도, 털모자도, 등산바지도 모두 ‘남들이 입던 옷’이란 이유로 5000원짜리 한 장이면 내 것이 됐다. 판매원의 입에 발린 칭찬이나 옷맵시를 보기 위한 거울은 없지만 구제 옷들이 동묘시장의 최고 인기 아이템인 이유. 이런 착한 가격 덕이다.
‘어르신들의 홍대’에 젊은이들도 열광
지난 4일 찾은 서울 숭인동 동묘시장은 평일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쇼핑객들로 붐볐다. 동묘 벼룩시장 혹은 동묘 구제시장이라고도 불리는 동묘시장은 1호선과 6호선이 만나는 동묘역 주변으로 펼쳐진 재래시장이다. 평일 250∼300개, 주말 550∼600개 정도의 좌판이 모여 자연스럽게 거리시장을 형성한다. 과거에는 도깨비시장이라 불렸을 만큼 온갖 잡다한 보물들이 거래된다.
한때는 ‘할아버지들의 홍대 앞’이라는 별명으로 통용됐다. 그만큼 주로 60∼90대 어르신들이 애용하던 곳이었다. 요즘에는 2030세대의 패션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동묘시장의 변신은 최근 방영됐던 TV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영향이 크다. 아이돌과 개그맨이 동묘시장에서 쇼핑한 옷들을 입고 뮤직비디오를 찍은 뒤 젊은 층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여기에 아날로그 감성을 찾는 젊은이들의 요구가 보태지면서 고객 연령대는 몰라보게 낮아졌다.
이날 구입한 옷가지를 검은 비닐봉지에 한가득 담아 나오던 송다현(22)씨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쫙 뽑았는데 5만원도 안 된다”며 “동묘시장엔 처음 와봤는데 LP판이랑 수동 재봉틀, 워크맨 같은 신기한 물건이 많아 너무 재미있다”고 말했다.
가족단위 손님도 늘었다. 예비며느리와 인근 동대문시장에 왔다가 잠시 들렀다는 미래 시어머니 김은희(54)씨는 맨 바닥에 놓여 있던 유명 브랜드의 중고 캐리어를 보물 캐듯 찾아내 단돈 2만원에 구입했다. 김씨는 “여행을 앞두고 백화점에서 캐리어를 사려고 했는데 지나가다 우연히 ‘득템’했다”며 “비밀번호 기능도 제대로 작동하는 데다 정식매장에서 애프터서비스까지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 새것과 거의 다름없다”고 기뻐했다.
하지만 10여년 이곳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상인들이 꼽는 가장 이색적인 고객은 단연 중고생과 외국인들이다. 전국노점상연합회 동묘지부 3지부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모(53)씨는 “이곳에서 20년째 구제 옷 장사를 하고 있지만 교복 입은 중·고생들이 최근 부쩍 눈에 띈다”며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거나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학생들도 나이키 조던 운동화나 폴로 티셔츠 등을 1만∼2만원이면 구입할 수 있어 인기가 많다”고 설명했다.
중고생들 중에는 가수 지드래곤이 개그맨 정형돈과 뮤직비디오 ‘삐딱하게-동묘버전’을 촬영한 동묘시장 골목을 마치 유적 답사하듯 돌아다니는 이들도 있다. 뮤직비디오에 등장했던 동묘 동쪽 돌담길 골목에서 휴대전화로 열심히 동영상을 찍던 이준현(16)군은 “지드래곤의 뮤비를 나도 한 번 따라해 보려고 친구들과 학교 끝나고 왔다”며 “더 재미있게 찍어서 유튜브에 올릴 생각”이라고 말했다.
외국인들도 최근 동묘시장의 큰 고객이다. 이 지부장은 “필리핀과 아프리카 중개상들이 정기적으로 이곳을 찾기 시작했다”며 “필리핀 상인들은 얇은 여름옷, 아프리카 상인들은 초등학생들이 메는 가방을 주로 찾는다”고 전했다.
동묘 옆 시장, 최대의 적은 불
동묘시장을 찾는 연령대가 전 계층으로 확대되면서 한동안 지지부진했던 상권이 다시 살아나고는 있지만 상인들의 원천적인 걱정거리는 그대로다. 바로 이곳 노점상들이 모두 불법이기 때문이다. 대규모 노점상들이 자리를 펴고 장사를 하는 곳이지만 ‘노점’이라는 태생적 약점을 가진 탓에 이곳 상인들은 늘 좌불안석 장사를 한다.
10년째 동묘시장에서 시계 좌판을 하고 있는 한 상인은 “다들 (불법인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조심, 또 조심하려고 애쓴다”며 “혹시 모를 민원을 방지하기 위해 장이 서는 시간(평일 오후 2시, 주말과 공휴일은 오전부터)과 철수 시간(해가 떨어지기 시작할 때부터)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고 귀띔했다.
동묘시장을 관리하고 있는 종로구청 건설관리과 관계자는 “동묘시장 노점상 대부분이 생계형 상인이기 때문에 단속만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며 “질서가 잘 유지된다는 전제 하에서 구청도 영업을 허용하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이곳 거리 좌판의 또 다른 특징은 날이 추워도 휴대용 난로를 켜는 이가 없다는 점이다. 인근 동묘(동관왕묘·東關王廟)가 보물 제142호로 지정된 문화재인 데다 파는 물건 중에 타기 쉬운 옷가지가 많아 화재 원인이 될 만한 난방기구들은 상인들 사이에서 금기물품이다. 특히 2008년 남대문 화재 사건 이후 ‘불’이라면 부쩍 예민해졌다.
한 상인은 “아무리 날이 추워도 난로는 절대 피우지 않고 정기적으로 소방훈련도 실시한다”며 “상인들 모두 주변 초등학교 아동지킴이로 활동하거나 교통안전지킴이로 나서는 등 주변에 피해를 입히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수현 기자 siemp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