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쿡기자] 영화 ‘변호인’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

[친절한 쿡기자] 영화 ‘변호인’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

기사승인 2013-12-26 22:06:00


[친절한 쿡기자] 밤 8시25분 영화관에는 빈 좌석이 딱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요즘 흥행작이라더니. 투덜대며 동행과 함께 이웃 영화관으로 옮기는 사이, 스마트폰에서 반짝이던 ‘밤 9시40분 빈자리 3석’도 ‘매진’으로 바뀌었습니다. CGV에서 롯데시네마로, 다시 옆 동네 롯데시네마로 발길을 옮기며 꼭 보고 말리라, 오기가 생겼어요. 세 번째 극장에서야 자리를 찾아냈습니다. 단성사에서 피카디리, 허리우드극장으로 종로통을 헤매며 영화를 보던 20대의 어느 여름 이후 처음 해본 한밤중 영화관 순례였습니다.

크리스마스 밤 계획도 없이 영화관에 간 건 순전히 지난 며칠 만난 40대들 때문이었습니다. 공·사석에서 만난 최소 8명이 영화 ‘변호인’ 얘기를 꺼냈습니다. “‘변호인’ 보러 갈 거야.” 어느 밥자리에서는 커플의 이 한마디에 또 다른 부부가 “우리도”라며 따라붙었죠.

그들은 이튿날 조조 표를 끊고 함께 ‘변호인’을 관람했습니다. 개중 몇 사람은 묻지 않았는데 “나는 ‘변호인’을 보러 갔다 왔노라”고 말했습니다. 어쩐지 고백이라도 하는 말투였어요.

그렇게 들으려 한 청자 쪽 편견이었을까요? 확실히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을 토대로 한 영화 ‘변호인’을 봤다는 발언은 “어제 ‘어바웃 타임’ 봤어” 혹은 “‘호빗’의 빌보가 ‘셜록’의 왓슨이 맞는 거야?” 같은 말들과는 다르게 들렸습니다. 말투 속에서 감지되는 건 동류의식인 듯했습니다.

‘변호인’을 봤거나, 보겠다고 말하는 이들은 그 말을 통해 어떤 판단이나 인식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그걸 정치적 지지 혹은 반대라고까지 과장할 건 없습니다. ‘변호인’을 본다는 것. 그 소박한 행위를 통해 1980∼90년대를 기억하는 세대가 회고의식을 치를 기회를 갖는다는 것만으로도 ‘변호인’의 흥행은 충분히 특별해 보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1주기 무렵 그와 관련된 책들이 100종 넘게 쏟아져 나온 일이 있습니다. 유시민 전 장관이 정리한 자서전 ‘운명이다’는 몇 주간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고, 정치·사회 부문 베스트 10위권 절반이 노 전 대통령 관련 책들로 채워졌죠. 생애를 돌아본 에세이와 사진집, 참여정부 평가, 민주주의 탐구서는 물론이고 화가 작가 정치인 사회운동가 등 각계 인사가 저마다의 방식과 시선으로 ‘노무현’에 대해 썼죠.

한국 사회에서는 대통령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관제 냄새’가 풍깁니다. 그래서 책이라는 가장 지적인 방식으로 대통령을 논했던 당시 출판계의 ‘노무현 열풍’은 두고두고 특이한 문화현상으로 기억됩니다.

3년여가 흐른 2013년 12월 노무현을 말하려는 욕구는 극장가로 옮겨왔습니다. 여기에는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잘 만들어진 드라마의 힘도 역할을 했다고 믿습니다.

더불어 영화가 스스로를 포지셔닝한 영리함은 언급할 만합니다. 영화 속 시계는 1981년이고, 영화가 말하는 ‘변호인 노무현’의 삶은 1987년에서 끝이 납니다. 그 후 그의 삶이, 우리의 시대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변호인’이 영리한 건 아마 이 지점일 것입니다. 이야기는 가난한 고시 준비생에서 돈 잘 버는 세무변호사를 거쳐 막 인권변호사의 길에 들어선 주인공을 보여주면서 끝을 맺습니다.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 영화는 마무리됩니다. 끝이 비로소 시작이었음을 이해시키는 것으로, 이어질 긴 서사시가 오늘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각자에게 상기시키는 것으로, 영화는 요란하지 않게 제 역할을 해냈습니다.

이영미 사회부 차장 ym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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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기 기자
ym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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