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쿡기자] 영연방과 일부 유럽 국가들은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12월 26일을 ‘박싱데이(Boxing Day)’라고 부릅니다. 스포츠 마니아라면 연말마다 박싱데이라는 용어를 자주 접했을 겁니다. 크리스마스와 박싱데이를 연휴로 지정한 이들 국가는 대개 축구나 경마 등 스포츠를 즐기기 때문이죠. 성탄절을 전후로 매출 상승을 시도하는 제조·유통업계와 마찬가지로 이들 국가의 스포츠 산업에서 박싱데이는 이벤트 매치를 성사시켜 입장권과 중계권 수익을 올리기에 좋은 날입니다.
박싱데이의 어원에는 여러 가설이 있죠. 봉건시대에 음식을 얻기 위해 크리스마스 다음 날 상자를 들고 성으로 몰린 농노들을 비꼬는 영주의 조롱에서 비롯됐다는 가설부터 너그러운 영주에게서 곡식과 옷이 담긴 선물상자를 받은 농노들의 존경에서 유래됐다는 가설까지 다양한 의견이 존재합니다. 최근에는 선물을 꺼내고 비워진 상자가 크리스마스 다음 날 집 앞에 가득 쌓인 풍경 그 자체로 박싱데이의 의미가 성립한다고 합니다. 주는 사람의 마음이 어떻든 크리스마스 선물에서 비롯된 용어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기성용(24·선덜랜드)이 26일(현지시간) 영국 리버풀 구디슨파크에서 열린 에버튼과의 2013~2014시즌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 18라운드 원정경기에서 전반 24분에 넣은 결승골도 누군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이 됐습니다. 프리미어리그 데뷔 골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박싱데이에 넣었으니 시기도 좋았습니다. 이 선물을 받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17만명
우선 선덜랜드 서포터스를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영국 북동부 해안에 위치한 타인위어주 선덜랜드에는 2001년을 기준으로 17만명이 살고 있습니다. 선덜랜드에는 북부 디비전2의 선덜랜드 리홉CA와 일본 자동차 닛산의 생산 공장을 중심으로 결성된 선덜랜드 닛산FC 등 다른 클럽들이 있지만 통칭 선덜랜드로 불리는 기성용의 소속팀 선덜랜드AFC가 도시를 대표하는 구단입니다. 17만명의 시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선덜랜드는 올 시즌 전반기 내내 극심한 부진으로 최하위(20위)에서 맴돌았습니다. 부진이 후반기까지 이어지면 다음 시즌 2부 리그 강등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박싱데이 매치에서 기분 좋게 거둔 승리로 강등권 탈출의 발판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선덜랜드는 중간전적 3승4무11패(승점 13·골 -17)로 최하위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강등권 탈출의 하한선인 17위 크리스탈 팰리스(5승1무12패·승점 16·골 -15)와의 승점 차를 3점으로 좁혔습니다.
선덜랜드는 크리스탈 팰리스와 18위 풀럼(승점 16·골 -16), 19위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승점 14)가 승점을 추가하지 못한 상황에서 또 승리하면 골 득실점 상황에 따라 단숨에 17위로 도약할 수도 있습니다. 지난 8월 리그 개막전부터 4개월 넘게 절망에 빠진 선덜랜드 서포터스에게 모처럼 승리를 안긴 기성용의 골은 가장 큰 크리스마스 선물이었을 겁니다.
첼시와 리버풀
첼시와 리버풀은 기성용의 골로 최상위권을 유지하는 어부지리의 행운을 얻었습니다. 선덜랜드가 격파한 에버튼은 현재 프리미어리그 5위의 강호입니다. 아스날과 맨체스터시티(이하 맨시티), 첼시, 리버풀 등 ‘빅4’와 상위권 도약을 노리는 ‘디펜딩 챔피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사이에서 에버튼은 상위권 판세를 흔드는 변수 가운데 하나입니다.
에버튼을 상대로 한 선덜랜드의 승리는 박싱데이 매치에서 최고의 이변이었습니다. 에버튼이 당초의 예상대로 선덜랜드를 손쉽게 물리쳤다면 18라운드를 끝낸 현재의 프리미어리그 순위표는 다른 모습이었을 겁니다.
에버튼은 선덜랜드에 세 골 차 이상으로 승리할 경우 3위로 도약할 수 있었습니다. 이 경우 같은 날 스완지시티를 1대 0으로 물리친 첼시는 골 득실차에서 밀려 4위로, 맨시티에 1대 2로 분패한 리버풀은 5위로 내려갔을 겁니다. 17라운드까지 선두였던 리버풀의 경우 4위로 추락하는 수모를 당했지만 기성용 덕에 에버튼을 완충제로 삼고 충격파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현재 1위는 아스날(승점 39), 2위는 맨시티(승점 38), 3위는 첼시(승점 37), 4위는 리버풀(승점 36), 5위는 에버튼(승점 34)입니다. 기성용은 의도하지 않게 첼시와 리버풀에게도 크리스마스 선물을 안겨줬습니다.
홍명보
홍명보(44) 축구대표팀 감독에게도 작지 않은 선물이 됐을 겁니다. 기성용은 이달 초부터 수비형 미드필더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로 자리를 바꿨습니다. 공격적으로 상대 진영을 돌파하고 과감하게 슛을 때린 기성용이 최근 골러시를 이어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기성용이 지난 18일 홈구장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열린 2013~2014시즌 잉글랜드 리그컵대회 캐피탈원컵 8강전에서 강호 첼시를 무너뜨린 결승골은 잉글랜드 진출 두 시즌 만에 넣은 데뷔 골이었습니다. 스완지시티 소속이던 지난 시즌부터 지난달까지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한 기성용은 득점에 대한 압박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실제로 골을 넣지도 않았죠.
하지만 공격형 미드필더로 바꾼 위치는 기성용의 공격력에 날개를 달았습니다. 프리미어리그 데뷔 골을 넣은 이날까지 두 경기 연속으로 골망을 흔들어 이를 입증했죠. 페널티킥 골이어서 인정할 수 없다면 이를 만든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기성용은 전반 22분 에버튼의 골키퍼 팀 하워드(34)가 동료에게 보낸 패스미스를 가로채고 돌파를 시도하다 하워드의 태클에 넘어졌습니다. 하워드의 퇴장과 페널티킥을 모두 이끌어냈죠. 말 그대로 일석이조였습니다. 직접 키커로 나선 기성용은 집중력을 방해하는 에버튼의 홈관중의 견제에도 침착한 오른발 슛으로 골문 왼쪽 구석을 열어 승부를 갈랐습니다.
기성용의 이 같은 변신은 2014년 브라질월드컵 본선을 앞둔 홍 감독에게 한 가지 해법을 제시했을 겁니다. 우리 대표팀에는 손흥민(21·레버쿠젠)과 이청용(25·볼튼 원더러스) 등 강력한 공격형 미드필더들이 있습니다. 기성용이 수비형 미드필더로 계속 뛰어도 무리는 없는 상황이죠. 하지만 조별리그에서 수비보다 공격에 집중해야 하거나 16강 진출을 위해 많은 골이 필요할 때 공격수부터 수비형 미드필더까지 전방과 중원에 변화를 주면서 기성용을 공격형 미드필더로 끌어올리는 변칙 전술이 홍 감독에게 가능해졌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기성용보다는 선덜랜드의 거스 포예트(46·우루과이) 감독이 홍 감독에게 안겨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혜진
누구보다 아내 한혜진(32)씨에게 가장 큰 선물이었을 겁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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