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빌려준 점포는 환산보증금 기준선 4억원을 훌쩍 넘어 상가임대차보호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임대료가 비싼 신촌에는 이 법이 ‘보호하는’ 점포가 많지 않다. 재계약은 1~2년 단위로 이뤄지며 그때마다 임대료가 크게 오른다. 임차인이 임대료 인상을 거부하면 내보내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마음만 먹으면 15년 쌈밥 팔아 번 돈을 몇 년 만에 만질 수도 있었다.
김씨는 그러지 않았다. 임차인이 원하는 대로 계약기간을 5년으로 했다. 신촌 상권의 ‘룰’을 깬 것이다. 임대료도 물가 상승폭 정도만 올렸다. “굳이 왜 그러느냐”며 주위에서 말려도 듣지 않았다. 김씨는 23일 “15년간 장사하며 권리금을 인질 삼아 임대료 2~3배씩 올리는 걸 많이 봤다. 건물주지만 나도 임차인인데 어떻게 그러겠나”라고 했다.
이재삼(65)씨는 신촌역 근처 7층짜리 건물을 20년째 소유하고 있다. 지난 7일 임차상인 중 한 명과 재계약을 했는데 임대료를 한 푼도 올리지 않았다. 처음 계약한 지 3년이 지났지만 임대료는 3년 전 그대로다. 이씨는 “건물은 내 거지만 점포는 내 것이 아니지 않냐. 내가 받을 만큼만 받으면 된다. 욕심내서 임차인 내쫓고 건물 분위기 나빠지면 결국 내 손해”라고 말했다.
지난달 28일 이들을 비롯한 신촌 건물주 9명이 서대문구청에서 임차상인들과 ‘신촌 상권 임대료 안정화 협약’을 맺었다. 건물주는 임대료와 보증금 인상을 유보하고 임차인은 바가지 상술, 호객행위 등 상권 활성화에 저해되는 영업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3월 1일부터 곧바로 시행된 협약에 따라 건물주 9명이 보유한 건물 9곳에서 50여개 점포가 혜택을 보게 됐다.
협약을 주도한 신촌번영회 손문석 사무국장은 “황금알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지 말자는 공감대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눈앞의 임대료에 매달리면 결국 상인들이 어려워지고 그러면 건물의 가치, 상권의 질이 떨어진다”며 “건물주와 임차인이 함께 살아가야 이 거리가 되살아난다. 욕심 부리지 말고 길게 보자는 것”이라고 했다.
협약은 위기감에서 비롯됐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무대인 신촌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대학상권이었다. 그러나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정점으로 계속 쇠락했다고 상인들은 말한다. 손 국장은 크게 네 가지 원인을 꼽았다.
과도한 임대료 상승에 대형 프랜차이즈 매장이 거리를 점령하면서 상권이 특색을 잃었다. 이에 주된 소비층인 젊은이들이 홍대 상권으로 대거 유출됐다. 주변 대로에 버스중앙차로가 생겨 유동인구의 중간 기착지 효과마저 반감됐다. 매출이 줄자 상인들의 재투자와 신규 유입이 크게 감소했다.
서대문구는 지난해 12월 신촌 건물주 70여명과 간담회를 가졌다. 연세로의 대중교통전용지구 조성에 따른 상권 활성화 토론이 벌어졌는데 건물주와 임차인의 상생 방안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를 토대로 지난달 신촌번영회 총회에서 ‘신촌의 영광을 재현하자’는 논의 끝에 ‘황금알 거위론’과 함께 협약이 추진된 것이다. 신촌번영회는 건물주·임차상인·주민 등 40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건물주 40여명 중 9명이 협약에 서명했다.
협약에 동참한 건물주 최병국(65)씨는 “5년 전과 비교해 손님이 줄어든 게 눈에 보인다. 임차상인들이 즐겁게 일할 분위기가 돼야 신촌이 살고 나도 산다”고 말했다. 이재삼씨는 “협약 이후 건물주 모임에 갈 때마다 ‘요즘 경기도 어려운데 (임대료를) 올리긴 뭘 올려요’ 라고 한다”고 귀띔했다.
손 국장은 “강제력 없는 약속이지만 ‘나비효과’를 기대하고 있다”며 “호응하는 건물주가 늘면 새로운 아이템으로 도전하는 상인이 많이 유입돼 신촌의 분위기도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