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터필러(caterpillar)’라는 말이 2일부터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내립니다. 걸그룹 에프엑스(f⒳)의 신곡 ‘레드 라이트(red light)’가 이 단어 때문에 KBS 심의를 통과하지 못했다하네요. 대체 무슨 뜻일까요?
KBS는 이 단어를 특정상품 브랜드라고 했습니다. 상품 홍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방송 부적격 판정을 내렸다는 겁니다. 실제 ‘캐터필러’는 1925년 미국에서 설립된 중장비 제조회사입니다. 오랜 역사를 지닌 세계적인 기업이죠.
그런데 ‘캐터필러’가 국어사전에도 나옵니다. 국립국어원이 제공하는 표준국어대사전에 검색하니 버젓이 등재돼 있습니다. ‘무한궤도’의 같은 말이라고요. 무한궤도는 ‘차바퀴의 둘레에 강판으로 만든 벨트를 걸어 놓은 장치’입니다. 탱크 바퀴를 떠올리면 쉬울 것 같네요.
국어사전에 올랐다는 건 대중이 일상생활에서 그 단어를 ‘특정 브랜드’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아스피린’이나 ‘크레파스’가 대표적이죠. 아스피린은 독일 제약회사 바이엘이 1897년 개발한 진통제입니다. 크레파스는 1926년 일본의 사쿠라상회가 크레용과 파스텔의 중간성질을 따서 만든 상품이고요. 이렇게 브랜드명이 보통명사가 되면 법적으로도 상표권을 잃게 됩니다. ‘바셀린’ ‘호치키스’ ‘폴라로이드’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KBS가 ‘레드 라이트’에 적용한 기준에 따르면 ‘아스피린’이나 ‘크레파스’라는 단어는 노랫말에 들어가선 안 됩니다. 지난해 나온 딕펑스의 ‘아스피린’이나 아이유의 ‘크레파스’는 방송에 부적격한 노래였던 셈입니다. 참고로 아이유의 ‘크레파스’는 KBS 2TV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예쁜 남자’의 OST였습니다. 노래에 나오는 브랜드 명이 사람들에게 “그 상품을 구입하라”고 들리는지를 문제 삼지 않더라도 이번 심의는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사실 가요에 적용되는 ‘황당’ 심의는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특정 브랜드를 언급했다’는 이유는 양반입니다. 에프엑스의 노래와 함께 심의를 받은 신해철의 ‘캐치 미 이프 유 캔(Catch me if U can)’은 ‘가사가 선동적’이라며 부적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문제의 가사는 “뿌리고 누르고 짓밟고 태우고”와 “다 쥬기자 몽땅 쥬기자 바퀴벌레 쥬기자” 등입니다.
오렌지캬라멜이 3월 공개한 ‘까탈레나’ 뮤직비디오는 ‘인명경시’ 때문에 전파를 타지 못했습니다. 인어로 변신한 오렌지캬라멜 멤버들이 비닐 포장팩 안에 들어가 있는 모습이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여기는 분위기를 풍긴다는 거였죠. 지난해 부적격 판정을 받은 싸이의 ‘젠틀맨’ 뮤직비디오는 주차금지 시설물을 발로 걷어차는 장면이 ‘공공기물 훼손’으로 비쳐지기도 했습니다.
가요 심의는 방송 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검열’에 가까운 심의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가수들은 방송사의 자율심의를 통과하지 못하면 음악 프로그램은 물론 라디오 등 모든 방송 활동이 금지됩니다. ‘개인을 향한 개인적 원한을 담은 노래’(JYJ의 ‘삐에로’)라거나 ‘제목이 불쾌감을 조장 한다’(넬의 ‘기생충’)는 이유가 받아들이기 힘들지라도 가수는 심의실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SM엔터테인먼트도 3일 “방송활동에 지장이 없도록 ‘캐터필러’를 ‘무한궤도’로 바꿔 재심의에 통과했다”고 전했습니다. 이번 사건으로 중장비 회사 ‘캐터필러’는 네티즌들에게 확실히 각인됐습니다. ‘상품 홍보를 막겠다’던 KBS 덕분입니다.
박상은 기자 pse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