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이끄는 건 주인공이다. 그러나 짧은 등장에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이들이 있다. 정식 용어로는 ‘신 스틸러(scene stealer)’라고 한다. ‘미친 존재감’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명량’(감독 김한민)에서 이정현이 그랬다. 대사 한 마디 없지만 존재감은 강력했다.
극중 이정현은 왜군에 의해 가족을 잃은 후 벙어리가 된 정씨부인을 연기했다. 몇 번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탐망꾼 임준영(진구)을 만난 뒤 달라진다. 그의 부인이 돼 곁을 지키며 살아간다. 그런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적진을 오가는 남편을 지켜보며 또 다시 가족을 잃을까 노심초사한다. 불안에 떨지만 묵묵하게 그를 기다린다.
영화에서 이정현은 몇 장면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올 때마다 돋보인다. 그의 연기는 영화 속에서 잘 어우러졌고, 관객의 몰입도를 높여 줬다. 대사가 없어서 손짓, 발짓, 눈빛으로 모든 걸 표현했다. 역설적으로 말을 안 하니 감정은 더 분명하고도 강렬하게 전해진다. 수화도 스스로 만들었다. 자신이 느낀 감정을 그대로 수화에 녹여 관객의 가슴을 적셨다. 원래 수화 그대로 연기했다면 오히려 감정 연기가 반감됐을 수도 있다.
이정현은 시사회에서 “눈빛과 가슴만으로 연기를 해야 해서 힘들었다”고 말했지만 능숙하게 잘 소화했다. 치마저고리를 벗어 흔들며 절규할 땐 관객들의 몰입도는 정점에 달한다. 물론 극중 남편인 진구가 있었기에 더욱 빛날 수 있었다.
단 12척의 배로 330척 왜군의 공격에 맞서 싸워 승리한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을 그린 영화 ‘명량’은 무려 61분을 해상 전투신으로 채웠다. 명량해전을 스크린에 그대로 옮긴 듯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매끄럽지 않은 장면 전환이 흠이라면 흠이다.
‘명량’은 최민식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류승룡 조진웅 진구 김명곤 등 연기파 배우들도 대거 포진됐다. 그들의 연기는 훌륭했고, 버릴 캐릭터는 하나도 없었다. 박보검, 권율, 노민우, 고경표 등 신인배우들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하지만 이순신 아들 역을 맡은 권율(이회)을 너무 나약하게 그린 점은 아쉽다. 백성들이 끄는 나룻배에라도 탑승해 아버지를 도왔어야 하지 않을까.
초반 느슨한 전개는 피로감을 안겨준다. 역사스페셜이 떠오르기도 했다. 다행히 중후반부터는 속도감 있는 전개가 펼쳐진다. 최민식의 이순신과 류승룡의 구루지마를 비교해서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두려움에 떠는 병사들에게 이순신 장군은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외친다. 최민식이 아니었다면 이순신을, 류승룡이 아니었다면 구루지마를 어떤 배우가 맡았을까. 아무도 떠오르지 않는다. 왜군 용병 장수 와키자카(조진웅)의 카리스마도 만만치 않다.
‘명량’은 개봉 이틀 만에 100만을 돌파했다. 기대가 컸을까. ‘군도’(감독 윤종빈)만큼 아쉽다. 혹자는 애국 마케팅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영화가 끝나갈 때 배 안의 누군가 “나중에 후손들이 우리가 이렇게 개고생 한걸 알까 모르겠네! 모르면 호로 자식이제”라는 대사에는 많은 이들이 뜨끔할 것 같기도 하다. 이 영화, 한 번쯤 볼만하다. 128분.
최지윤 기자 jyc89@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