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조각의 대가’로 평가받는 심문섭(71) 작가가 난생 처음 회화 작품을 선보여 화제다. 9월 27일까지 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현대에서 ‘The Presentation to the Island(섬에게 바침)’이라는 타이틀의 개인전에 나무를 다듬어 만든 기존 조각 작품 7점과 함께 바다 풍경을 그린 새로운 회화 작품 11점을 내놓았다.
서울대 미대를 나온 작가는 1971∼75년 프랑스 파리 청년비엔날레와 1995년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 등 각종 국제행사에 참여해 주목받은 한국 조각계의 대표작가다. 2002년 한불 문화상, 2007년 프랑스 예술문화 훈장을 받기도 했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철거된 건물의 목재를 모아 제작한 ‘목신’이 그의 대표작이다. 그런 그가 붓질에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13일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원래 어릴 적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회화든 조각이든 표현방식이 다를 뿐 미술이라는 관점에서는 같은 것”이라며 “파리와 서울, 통영 작업실을 오가며 7년 전부터 드로잉 작업을 꾸준히 했는데,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겨 회화 작품을 전시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의 그림은 고향인 경남 통영 앞바다를 때론 역동적으로, 때론 고요한 이미지의 단색 추상화로 화면에 옮긴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이 있었고, 한려수도가 펼쳐지는 통영 앞바다. 어머니의 품속 같은 고향 바다를 단색화를 통해 펼쳐보였다. 그것은 그린다는 미술 본래의 기능과 역할로 되돌아간 작가의 예술적 귀향이라고나 할까.
그는 “존재와 시간, 변화와 균형, 생성과 소멸 등 평소 추구해온 요소가 바다에 다 있다”며 “파도에 휘둘리면서 붓질은 물살 치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맡겼다”고 설명했다. 자연 풍경을 자연스럽게 그려낸 회화는 나무와 흙, 돌 등 소재에 작가가 최소한 개입하고 자연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도록 한 조각 작업과 일맥상통한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건물이 헐리면서 길바닥에 나온 목재들을 주워 모아 제작한 조각 작품도 선보인다. 작가의 작품을 운송하는 데 쓰였던 나무 상자는 ‘취급주의’(fragile) 스티커가 붙은 채로 전시장에 놓였다. 폐기처분될 운명이었던, 즉 ‘내용물이 아니었던’ 상자가 ‘내용물’이 되는 순간이다. 바깥에 있어야 할 대나무와 실내에 놓이는 테이블은 한 공간에 어우러져 서로 충돌하면서도 마치 원래 한 몸이었던 듯 조화를 이룬다.
작가는 “조각은 재료의 예술이자 물질의 예술”이라고 강조했다. “예전에는 작가가 작품에 얼마나 개입할지가 중요했죠. 조각가가 생각하는 대로 100% 끌고 갔어요. 하지만 지금은 작가의 얘기를 줄이고 물질에 얘기를 시키자는 겁니다. 적당한 지점에서 물질 내부의 소리를 들어보자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진행형’이라고 했다. 단순한 형태를 통해 재료 본연의 모습을 제기하듯 작가가 ‘물질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도록’ 만든 작품을 해석하는 것도 보는 사람의 몫이라는 이유에서다. 갤러리현대는 이번 전시에 맞춰 본관의 전시 공간을 확장·보수했다.
전시를 둘러본 단색화의 대가 정상화 화백은 “화가의 작품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조각의 공간개념이 평면에 스며들었다”고 말했다. 또 박서보 화백은 “조각의 대가가 그림까지 그리면 우리는 어쩌라고 그러느냐”며 웃었다. 화가는 대부분 자신의 그림에 빠져들어 붓질하게 되는데 심 작가의 회화는 한 걸음 물러나 관조하는 붓질이라는 것이다.
오광수 미술평론가는 “작가가 자연 속에 자신을 자맥질시킴으로써 인간과 자연이 혼연일체가 되는 현전(現前). 이야말로 노자가 무위자연을 말하면서 자연 속에 노닌다고 한 그 노님의 경지인지 모른다. 인간이 풍경화 되는 경지 말이다”라고 평했다.
작가는 “나는 바쁜 일상 속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풍경들과 마주한다. 그 이름 없는 풍경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며 특정한 것으로 느껴지기도 하며 낯익은 것처럼 느껴지던 풍경들은 낯선 것처럼 되기도 하고 낯익은 것 같기도 한 미완결인 채 그대로인 즉 규정할 수 없는 것이 되곤 한다”고 말했다.
그는 ‘여유로운 날’이라는 제목의 작가노트에서 시 한 구절을 적었다. “망망한 바다/ 뭔지 감추고 드러내지 않는/ 새로움 같은 것/ 일렁이는 파도는/ 어떤 결정적인 순간을 만들며 사라진다./ 임시적이고 가설적인/ 생각의 공간에 머물게 하며/ 잔잔한 바다에 마음먹고 돌 몇 개를 던져 볼까 한다./ 저 바다는 알고 있을 것이다./ 나를 사로잡았던 바다를/ 스치는 바람소리처럼/ 오늘은 여유로운 날이 될 듯하다.” 그림을 보는 순간 작가의 고향 통영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02-2287-3515).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