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하나 건너려면 횡단보도 3개 경주하는 기분이에요.”
회사원 강모씨(29)는 회사 근처 청담역 14번 출구 앞 왕복 8차선 길 위에 있는 횡단보도를 자주 오고간다.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강씨는 횡단보도 2개와 도로 한 가운데에 있는 약35m 길이의 중앙섬을 지나야 한다. 문제는 이 횡단보도의 녹색등 시간이 짧다는 것이다. 너비 30m의 4차선 도로 녹색등은 20여초 만에 점멸됐고, 사람들이 중간에 급하게 뛰는 모습이 종종 보였다. 간신히 횡단보도를 건너도 반대편 횡단보도의 녹색등이 5초 만에 바로 들어와 약 35m의 중앙섬에서 사람들은 잰 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강모씨는 “점심 먹고 길을 건널 때 녹색등이 너무 빨리 바뀌어서 갑자기 중간에 뛰게 된다. 가끔은 울렁거릴 정도”라며 “나도 뛰어야 할 정돈데 나이가 많거나 몸이 불편하신 분들은 어떨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단순한 착각이 아니다
횡단보도가 유난히 다른 곳 보다 더 빨리 바뀌는 것 같다는 보행자들의 생각은 단순한 착각이 아니다.
서울시의 ‘교통신호등 운영방식’에 따르면 녹색불이 켜지는 시간은 보행 시간인 7초에 횡단보도 보행자 평균 속도 1m당 1초씩 늘어난다. 예를 들어 횡단보도 길이가 20m일 경우 7초에 20초가 더해져 27초 동안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청담역 앞 사거리의 녹색등이 켜지는 시간은 횡단보도의 너비 30m를 고려했을 때, 약 20초가 아닌 37초가 돼야 한다.
규정을 어긴 건 이 횡단보도의 녹색등이 다가 아니다.
서울을 넘어 전국의 횡단보도들을 고려하면 규정이 실제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는 더 많아진다. 강원일보의 지난 1월 보도에 따르면 강원도 내 주요도시의 횡단보도 50곳을 무작위로 조사한 결과 60%에 달하는 횡단보도가 규정보다 짧게 녹색 신호를 운영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1초에 1m를 걸을 수 있을까
보행자들이 평균 1초에 1m를 걷는다는 기준은 적정할까?
이 기준은 2005년 경찰청의 ‘교통신호기 설치관리 매뉴얼’을 기반으로 한다. 문제는 우리사회가 점점 고령화됨에 따라 그 평균치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국무조정실 안전관리개선기획단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횡단거리 24m의 건널목을 24초 안에 건너지 못할 확률은 70대가 18%, 80대가 84%에 달한다. 노인뿐만이 아니다. 장애인, 유아 등 사회의 취약계층은 단순히 횡단보도를 건너다가도 교통사고의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
지난 2013년 65세 이상 노년층 교통사고 건수는 약 4500건으로 2년 전보다 20% 증가했다. 서울시는 대책으로 노인 보호구역을 설정, 횡단보도 이동속도를 1.0m/s에서 0.8m/s로 완화하고 횡단보도 보행 전 대기신호 시간을 2~3초 더 부여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하지만 노인보호구역의 수는 59곳으로 턱없이 부족하다.
파고다 공원 사거리에서 만난 윤모씨(75)는 “확실히 나이가 들면서 녹색불이 빨리 바뀐다고 느끼지만 노인이 불편하다고 다 바꿀 순 없는 법 아니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며 “오히려 요새 젊은이들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서 길을 천천히 건너는 경우를 종종 봤다”고 말했다.
장애인들도 비슷한 고충을 겪고 있었다. 장애인을 앉힌 채 뒤에서 휠체어를 밀던 한 젊은 여성은 횡단보도를 전력 질주했지만 결국 녹색등 시간 내에 길을 건널 수 없었다.
불편하게 한 쪽 다리를 절며 길을 걷던 황모씨(65)는 “도로를 건너는 중간에 빨간불로 바뀌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행히 차가 대기해주긴 하는데 불안한건 어쩔 수 없다”고 털어놨다.
2년 반 동안 한국에서 살았다는 세실리아(45·스웨덴)씨는 고국과 비교했을 때 한국이 “확실히 녹색등의 시간이 짧다”며 “차보다는 보행자를 더 우선시 해주는 문화가 정착되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말했다.
법 제정도 중요하지만
물론 횡단보도 시간을 늘리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파고다 공원 앞에서 거리를 정리하던 경찰은 “신호등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노인 분들이 녹색등이 얼마 안 남았는데도 무작정 느긋하게 횡단보도를 건너는 게 문제”라며 “녹색등 시간이 길어지면 교통체증도 생기기 쉽고 운전자들도 불편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장애인이 살기 좋은 은평을 만드는 사람들’의 ‘장벽 없는 마을 만들기’ 간사 박영민씨는 “어린이·노인보호구역에 비해 장애인보호구역 지정률이 상당히 낮아서 주민 설문과 거리 홍보 활동을 통해 시민 의식 환기 노력을 할 예정”이라며 “법 제정도 중요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보행 약자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와 배려가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말했다. 정진용 기자 jinyong0209@kukimedia.co.kr 사진=이창용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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