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김현섭 기자] * 때로는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 한 마디가 현재의 사회 현안을 관통합니다. 뻣뻣하고 장황한 논평보다 단 한마디가 듣는 이들의 가슴을 더 시원하게 해 주기도 하고, 후벼 파기도 합니다. 연재 ‘뼈대(뼈 있는 대사) 있는 기사’ 입니다.
28일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담판’이 지어졌습니다. 일본 아베 총리 명의의 책임 인정, 한국의 피해자 지원 재단 설립 및 일본의 10억 엔 출연 등이 골자입니다.
우리 정부는 일본의 착실한 이행을 전제로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해결된 것이라고 확인했습니다. 상호 비방도 자제하기로 했기 때문에 직접 언급은 안 했지만 일본이 타결 내용의 약속만 실천하면 우리는 위안부 문제에 있어 일본을 ‘용서’한 셈이 됩니다.
해외의 눈은 각국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다릅니다. 미국은 박수를 치고 있고, 중국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죠. 국내에서도 여권은 환영을, 야권은 분노를 표하고 있습니다.
언론은 국내·외 정치권의 표정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정작 중요한 건 능욕의 세월과 그 한(恨)으로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겨버린 할머니들인데 말입니다.
피해자 이용수(88·첫 번째 사진) 할머니는 “회담 결과는 전부 무시 하겠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정치권에서 ‘끝났다고’ 했지만 이 할머니는 아닌 것이죠. 그렇다면 이 문제가 끝난 건가요, 끝나지 않은 건가요. 위안부 문제를 ‘끝을 낸다’는 기준이 어디에 있을까요.
딱 잘라 ‘어디에 있다’고 말하기보다 영화의 한 장면을 끄집어 내보겠습니다.
광주 인화학교의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도가니’(2011년 작)에 민수(백승환 분·두 번째 사진)란 청각장애 아이가 나오죠. 교사 성폭력의 피해자입니다. 어린 민수에게 보호자라고는 병든 아버지, 나이 든 할머니가 전부입니다. 어머니는 집을 나갔고, 하나뿐인 동생은 같은 피해를 당하다 열차에 치어 죽었습니다.
학교는 세상물정에 어두운 할머니를 찾아가 회유, 민수의 이름으로 제기된 소송을 취하시킵니다. 영화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어떤 조건(소설에서는 돈, 아이 유학비용 등으로 나옴)을 전제로 용서하겠다고 합의를 이끌어 낸 겁니다. 민수는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보호자의 결정은 유효하죠.
이를 알게 된 민수가 자신을 돕는 미술교사(공유 분), 시민단체 활동가(정유미 분) 앞에서 눈물을 쏟아내며 수화로 절규를 합니다.
“내가 용서 안 했는데, 도대체 누가 용서를 했다는 거예요! 나랑 동생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빌지도 않았는데, 누가요 누가!”
이 장면을 보고 단지 ‘넌 미성년자니까 보호자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용서한 게 맞다’고 여겨버린 관객이 있을까요.
그동안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직접 찾아와 무릎 꿇고 사죄하라”고 외쳐온 것, 이 할머니가 회담 결과 내용에 대해 “피해자들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 같다”고 일침을 놓은 것과 묘하게 겹칩니다. 이번 사과는 아베의 명의였을 뿐, 어디까지나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의 ‘대독(代讀)’이었습니다.
10억엔(약 98억원) 부분도 논란입니다. 일단 금액은 제쳐놓고서라고, 재단을 우리가 설립하고 일본이 ‘출연’을 한다는 모양새가 문제입니다. 말꼬리 잡고 늘어지겠다는 의도는 아니지만, ‘출연(出捐)’은 ‘금품을 내놓아 도와주다’는 의미입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일본의 ‘국가적 배상’을 원했지, “도와 달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29일 “일본의 잘못된 역사적 과오에 대해서는 한일관계 개선과 대승적 견지에서 이번 합의에 대해 피해자 분들과 국민 여러분들께서도 이해를 해 주시기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대승적이라는 건 사사로운 것에 얽매이지 말고 전체적 관점에서 봐 달라는 뜻이죠. 한일관계 발전, 동북아 평화 및 안정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런데 위안부 문제가 ‘얽매이지 말아야 할 사사로운 것’인지 혼란스럽습니다.
‘정치로는 끝났고, 당사자들은 안 끝났다.’
위안부 문제의 기가 막힌 결말입니다. afero@kukimedia.co.kr 페이스북 fb.com/hyeonseob.kim.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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