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장윤형 기자] ‘불신시대((不信時代)’.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불신이 바이러스처럼 퍼지고 있다. 1957년 ‘현대문학’에 발표된 단편소설 불신시대에서는 한국 전쟁 이후 아들의 죽음을 겪으며, 부조리하고 타락한 사회에 살고 있는 한 여인의 삶이 그려진다. 주인공은 부도덕하고 비인간적인 세상의 문제들과 맞닥뜨리며, 현실을 자각하고 저항한다. 소설 속 등장하는 불승들의 부도덕, 기독교 신자들의 비인간성, 의사들의 몰염치 등 세상의 모든 타락에 대해 주인공은 항거한다.
비단 소설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2016년 대한민국에서 ‘불신’이라는 단어가 확산되는 것은 현실의 부조리함이 커지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구조’와 ‘제도’가 ‘개인’의 안전과 생명을 담보하지 못할 때, 개인은 불가피하게 항거할 수 밖에 없는 숙명에 처한다. 생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239명의 임산부와 영·유아 등을 죽음에 이르게 한 ‘가습기 살균제’ 사태, 치료를 위해 병원을 찾았던 수많은 사람을 전염시킨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MERS)’ 확산 등의 일련의 사건들은 국민을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한 정부에 대한 불신을 야기했다.
특히 최근 논란이 된 가습기 살균제 사태는 2011년도부터 꾸준히 문제가 제기된 사건이지만 5년이 지나서야 검찰 수사가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당시 병원에서 원인 미상의 폐질환으로 사망한 환자들이 늘어났고 의구심을 품은 서울아산병원 등의 의료진들이 보건당국에 보고를 했으나, 보건당국이 유야무야 한 사이에 사망자는 늘어만 갔다. 정부가 하루라도 빠르게 인지를 하고 조치를 취했다면, 더 많은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이익에만 눈이 먼 ‘기업’과 독성물질에 대한 허가관리를 허술하게 한 ‘정부’가 빚어낸 비극이다. 이제 국민들은 “정부가 허가한 제품을 다시 재검토해야 한다.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정부에서 허가를 한 방향제 등의 화학제품 나아가 모든 제품들에 대해서도 믿을 수 없다는 인식까지 퍼져나가고 있다.
가습기살균제를 제조한 ‘옥시’는 지금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당연하다. 인체에 치명적인 제품을 소비자들에게 판매한 기업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피해보상도 철저히 해야 한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따로 있다.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제품에 대해 쉽게 허가를 내주고, 마트에 시판하게 한 ‘정부’의 책임이 크다. 관리감독의 책임을 방기한 보건복지부, 환경부 그리고 나아가 행정부에 대해 관리감독을 하지 않은 최종책임자인 ‘국가 수장’까지 모두 응당 책임을 져야 한다. 더불어 다시는 이러한 억울한 희생자들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철저한 진실 규명과 피해 보상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생후 14개월부터 산소통을 달고 살아야 했던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인 14살 임성준군의 힘겨운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친구들과 함께 뛰어놀고, 많은 것을 배우고 체험해야 할 나이에 산소통 없이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무기력함을 누가 보상해줄까. 가습기 살균제 사태는 한 아이의 꿈과 희망을 빼앗아간 것에 다름없다.
국민들을 ‘공포로부터’ 지켜줄 책임은 정부에게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최근 자주 사용한 어휘 중 하나가 ‘민의(民意)’다. 이는 풀어쓰면 ‘국민의 뜻’이란 의미를 지닌다. 박 대통령은 “남은 임기 동안 이번 선거에 나타난 민의를 잘 반영해서 변화와 개혁을 이끌면서 각계각층과 협력과 소통을 잘 이루어나갈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발언했다. 민의에는 곧 ‘가습기 살균제’, ‘메르스’와 같은 공포로부터 정부가 국민을 안전하게 지켜주라는 뜻을 담고있다. 박 대통령은 국민들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대통령이라고 스스로 말했다. 대통령의 말대로 ‘민의’를 받들어 국민들과의 약속을 지키길 바란다. newsroom@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