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대기만 꽂아도 춤사위가 되어라-안중국 소설가·전 월간산 편집장

막대기만 꽂아도 춤사위가 되어라-안중국 소설가·전 월간산 편집장

기사승인 2016-06-23 15:13:10

알루미늄 판에 긴 리본 모양의 곡선무늬를 새겨 넣은 그의 작품을 대하자 수십 년 전 초등학교 교문 밖 구석대기의 ‘또 뽑기’ 좌판이 떠올랐다. 뽑기 아저씨는 설탕을 녹여 휘젓다가 소다를 뿌려 부옇게 부풀어 오를라치면 얼른 쇠판대기에 부어 납작하게 누른 다음 별이나 나무 모양의 틀을 꾹 찍어서는 스윽 내밀었다. 그걸 그늘로 들고 가 옷핀 끝에 침을 묻혀가며 별 모양, 나무 모양을 그대로 따내는 데에 골몰하곤 했다. 그러다 결국 성공한 순간의 환희심이란-. 뽑기를 또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집중해서 별을 완성했다는 기쁨으로 그 날의 하굣길은 날을 듯 가벼웠다.

 

, 그런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유휴열의 작품세계란. 게다가 그의 작품 제목은 거의가 ‘추어나 푸돗던고’(춤 추어 풀었던고) 아니면 ‘생()·놀이’ 시리즈 아닌가. ‘인간’이라거나 ‘가족’이라는 제목을 단 작품에서도 주된 테마는 놀이이며, ‘인간’은 북이나 징을 치는 사람, 혹은 광대 가족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 문화의 원형은 한이 아니라 흥인 것 같아요. 전남 진도에선 상여를 아낙들이 멨어요. 남자들이 고기잡이 나갔다가 다 죽고 없어서-. 그래도 상여 나가기 전날 거리굿에선 곡을 하는 게 아니라 아주 신나게 놀아요. 저승길 흥겹게 잘 가라고 위로해서 보내는 거지요.

 

전주 모악산 자락 그의 30여 년 작업실에는 여러 가지가 보였다. 유화도 있고 조소도 있으며 빗살무늬나 리본 문양이 두드러진 알루미늄 판 작품들, 아이들이 보면 필경 커다란 로봇을 연상할 입상(立像)까지 작업실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는 그렇게 늘어놓고 ‘논다’. 이것 하다가 싫증나면 저것 건드려보고, 그러다 지루해지면 또 다른 소재 거리를 찾고 궁리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작품 소재로 삼아, 그릴 뿐 아니라 두들기거나 굽히거나 부수기도 한다. 온갖 소재를 다루려다 보니 도구도 여간 많지가 않다. 그의 표현을 빌면 작업실에 ‘처녀 불알만 빼고’ 다 있다.

 

사전에 정해둔 대로 완성해 가노라면 그것은 자칫 ‘놀이’가 아니라 ‘일’이 되기 쉽다. 그래서 그는 에스키스를 미리 준비한 대작(大作)이라 해도 작품의 삼사십 퍼센트는 늘 붓이나 손의 자연스런 흐름에 맡긴다. 농요를 주제로 삼아 한참 그려가다가 ‘시골 사람들 얼굴이 번들거리는 유화로 잘 표현될까’ 싶은 의문이 들면 ‘그렇지, 흙으로 해보자’, 이러다가 엉뚱하게 아크릴을 손에 들기도 한다.

 

그는 그렇게 여러 재료·도구들과 어울리며, 우연을 통해 드러나는 뜻밖의 아름다움에 화들짝 놀라기도 하며 재미나게 살아왔다. 2016년 올해로 그는 이미 환갑을 훌쩍 넘겼음에도 은행 계좌 마이너스 출금에 이자가 붙는 줄은 지난 봄 처음 알았다고 한다. 본드 칠하고 알루미늄 판 붙이고 태커 핀을 박고 자동차용 페인트를 칠하다 간혹은 손가락도 깊이 베는 그 일들이 그리도 재미났던 것일까. 웃음 곁들인 그의 대답은 한 술 더 뜬다.

 

“집사람이 바가지 긁어서 건들면 더 좋지요. 말 안 하고 작업만 할 수 있으니까.

 

자기 작품에 대한 그의 자존감은 예상을 넘어선다. 평면에 입체감을 넣은 대표적 화가는 피카소. 그러나 한 화면으로 고정돼 보일 뿐이다. “하지만 제 이 빗살무늬 작품은 방향에 따라 형태나 빛, 색감이 달라지지요”, 하며 최근 완성한 대작을 3시에서 9시 방향으로 찬찬히 이동하며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애정과 더불어 자부심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햇살에 수많은 줄무늬로 반짝이는 다락논을, 혹은 동네사람들 윷놀이 판을 벌이곤 했던 넓적한 멍석을 연상시켰다가 저기 티베트의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만다라를 대면했을 때의 감동으로도 인도한다.

 

춤추는 동작의 조소 작품을 그는 삼백 점쯤 만들기도 했다. “그러면 이제는 그냥 막대기만 꽂아도 그게 춤사위가 되어야 하는데, 아직 거기까지는 도통이 안 되었네요” 한다. 그 자신의 눈에는 춤사위가 보이지 않을까. 그는 역시 이렇게 되받는다. “내 눈에야 보이지만, 그게 다른 사람 눈에도 보여야지요.” 수십 년 세월을 재미나게 작품만 하며 살아왔으면서도 그는 이렇듯 아직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열정 덩어리다.

 

암벽등반은 자칫 실수하면 추락해 다치거나 심지어는 죽을 수도 있기에 고도의 몰입이 요구된다. 거기에서 암벽꾼들은 뜻밖에도 명상적인 휴식을 맛본다. 그렇듯 몰입은 깊은 휴식과도 상통한다. 그러니, 너무 재미있어서 종종 밤낮을 잊었던 그에게는 작업 자체가 삶이자 휴식이고 놀이일 수밖에. 모나고 꺾인 곳 하나 없이 둥글둥글, 열두 발 상모가 현란하게 허공에 그린 선형을 연상시키는 어느 작품에는 ‘리듬’, 그와 흡사한 다른 것에는 ‘만다라’라는 제목을 달았던 것은 그의 의식세계에선 흥겨운 리듬이 곧 우주의 본질·진수를 상징하는 만다라에 다르지 않아서일 터다.

 

많은 사람에게 삶은 고통이나 지루함이 대부분이며, 놀이하듯 즐거운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는 그 즐거움의 정수를 추출하여 화폭에 붙잡아 두었다. 언제든 끄집어내어 즐길 수 있는 놀이로-. 춤사위는 작품 소재에 따라 단순한 동작에서 빛의 춤사위로, 우주의 춤사위로까지 번지고 커져나간다. 그의 강한 표현욕은 당연히 더 넓은 화폭을 요구한다. 그의 작품은 그가 의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저절로 커진 것이다. 그의 엄청나게 큰 작품도 빈 틈 없이 꽉 채워진 듯한 것은 이런 연유일 터다. 이윽고 그의 놀이는 ‘별 잠’으로, 세상 모두가 어우러져 하나의 꽃을 이룬다는 ‘세계일화(世界一花)’로까지 진화한다.

 

혼자서 다시 한 번 그의 작업실 작품들을 돌아보는 동안 나도 모르게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나도 해볼까, 하는. 이중섭이 담뱃종이에 그렸듯, 송재 유휴열이 알루미늄 판과 자동차 페인트를 가지고 놀았듯, 나도 한 번 돌이든 나뭇가지든 무얼 가지고 재미나게 놀아볼까 하는. 더불어 어릴 적 뽑기 할 때의 감흥, 미술시간 한 시간이나마 몰입했던 ‘꿈 그리기’ 동안의 깊은 정적감이 되살아났다. 그 순간 나는 알아챘다. 유휴열 작가가 자신의 놀이마당에 나를 끌어들였음을.

 

그는 이를테면 미술이라는 놀이판의 상쇠였던 것이다. 상모를 신나게 돌리며, 꽹과리를 신명나게 두들기며 사람들의 박수와 추임새와 어깨춤을 유도하던. 그리하여 기어이는 온 마을사람을 농악 춤판 놀이꾼으로 끌어들이고 말았던.

 

저기 영산벌 쇠머리대기 축제장에서의 풍경이 되살아났다. 꽹과리 소리와 더불어 농악대의 환영이 희미하게 펼쳐졌다. 유휴열 작가의 작업실 여기저기 놓여 있던 ·놀이 작품들도 함께 덩실거리기 시작했다. 갱개 갱개 갱개개갱, 갱개 갱개 갱개개갱…….

 조규봉 기자 ckb@kukinews.com

조규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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