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바이오헬스혁신위원회가 출범하고 ‘신약 혁신 가치 반영’, ‘중증·희귀질환 치료 보장성 확대’ 등의 내용을 아우른 2차 건강보험종합계획이 발표되면서 환자 중심 보건의료정책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정부는 정책 사각지대에 놓인 환자들을 위해 신약이 신속하게 등재 될 수 있도록 제도를 도입하고, 치료제의 건강보험 적용을 확대하기 위해 재정을 적극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힘든 투병 과정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지친 환자들에게 희망이 된 이 약속은 현재 어떻게 이행되고 있을까. 한국의 신약 도입 현황과 급여 현실을 들여다봤다. [편집자주] |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신약 도입·급여 비율이 최하위다. 정부는 신약 도입과 급여를 확대해 중증·희귀질환 치료 보장성을 강화하겠다고 밝혔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이전과 달라진 게 없다는 아우성이 나온다. 약이 있어도 쓰지 못하는 ‘희망 고문’이 이어지면서 환자들은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KRPIA)의 글로벌 신약 접근 보고서에 따르면, OECD 국가 평균 신약 도입률(비급여 출시율)은 18%인 반면 우리나라는 5%로 약 4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세계적으로 100개의 신약이 나왔다면 국내에 들어오는 건 5개에 불과한 셈이다. 그마저도 대부분 비급여로 사용해야 한다. 한국에서 건강보험 급여가 적용되는 신약 비율은 22%로 OECD 국가 평균(29%)보다 낮다. 48%를 기록 중인 일본, 영국과 비교하면 절반에도 못 미친다.
신약 지출 비중도 저조하다. 유승래 동덕여대 약학대학 교수가 진행한 ‘신약의 치료군별 약품비 지출현황 분석’ 결과를 보면, 최근 6년간(2017-2022년) 건강보험 총 약품비에서 신약 지출 비중은 13.5%로, OECD 평균(33.9%)을 한참 밑돈다. 우리나라가 신약의 약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가격을 참조하는 A8(영국, 프랑스,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일본, 미국, 캐나다) 국가 평균(38.0%)과는 차이가 더 크다.
정부는 2006년 임상적·경제적 가치가 높은 의약품을 선별해 건강보험 혜택을 주는 ‘의약품 선별등재제도’를 도입했지만, 신약 접근성은 나아지지 않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유승래 교수는 “의약품 선별등재제도의 일환으로 약제비 적정화 방안이 시행된 이후 진료비 내 약품비 비중은 24% 수준으로 관리됐지만, 신약의 적정 지출에 대해서는 구체적 목표나 방향 설정이 부족했다”며 “선별등재의 순기능은 살리면서 접근성 향상과 가치 평가가 이뤄질 수 있도록 위험분담계약, 약품비환급제를 활용해 제도를 개선해 나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환자들이 체감하는 현실은 더 각박하다. 수년째 급여가 적용되지 않아 치료를 포기한 환자들도 있다. 최건우(가명·66세)씨의 경우 폐가 딱딱하게 굳어가는 특발성 폐섬유증을 앓고 있다. 산소호흡기가 없으면 숨이 차서 대화나 걷는 게 힘들다. 오랫동안 약을 써왔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몇 년 전부터는 약 부작용으로 햇빛알레르기가 생겨 깜깜한 밤에만 집 밖을 나선다. 집 안에서도 조명을 켜기 두려울 정도로 발진이 심하게 일어났다. 국내에 도입된 신약을 쓰면 숨찬 증상과 부작용을 모두 해결할 수 있지만, 비싼 약값이 발목을 잡는다.
최씨는 “약이 출시된 뒤 8년을 기다렸지만 특발성 폐섬유증 환자는 치료제인 ‘오페브’의 급여 대상에서 제외됐다”며 “한 번 투여 받을 때마다 200~300만원을 내야 하는데, 가족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약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정숙 한국혈액암협회 국장은 “기존 약은 부작용으로 인해 1년 안에 50%의 환자가 복용을 중단하는 상황”이라며 “오페브가 유일한 해결책이지만 비급여라 접근성이 매우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이어 “환자들은 평생 써야 하는 약인데, 언제까지 큰 비용을 부담하면서 치료를 해야 할지 걱정이 크다”며 “이미 일본, 미국, 영국 등 주요국은 급여화가 이뤄졌는데 우리나라는 유독 늦다”고 했다.
지지부진한 신약 급여 과정 속에서 환자들은 생사가 갈린다. 삼중음성유방암 환자이자 삼중음성유방암 환우회인 ‘우리두리구슬하나’의 대표였던 고(故) 이두리씨는 생전에 신약 급여가 간절했다. 딸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식을 함께하겠다는 꿈도 있었다. 그러나 이씨는 1년에 2~3억원이 드는 약값을 가족이 부담하게 할 수 없었다. 그는 말기 암 투병 중에도 환우회를 만들고 직접 발로 뛰며 급여화를 위해 힘썼다. 끝내 결실은 보지 못했다. 지난해 11월29일, 이씨는 신약을 써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삼중음성유방암은 30~40대 젊은 여성에서 발생하는 악성 종양으로, 뇌·뼈·간·폐 등으로 빠르게 전이된다. 기존 항암제로는 효과가 미흡해 환자 대부분이 3~5년 안에 재발을 경험한다. 효과가 있는 유일한 신약인 ‘트로델비’는 2023년 5월 국내에 출시됐지만 올해 2월이 돼서야 급여 문턱에 도달했다. 박지연 우리두리구슬하나 이사는 “삼중음성유방암의 특성상 젊은 나이에 꽃을 피워보지 못하고 떠나가는 환자들이 많다”며 “환자들은 신약으로 삶을 이어갈 수 있지만 약값 때문에 포기한 상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건강보험 적용 여부를 심사할 때 단순히 경제적 측면만 고려하지 말고, 그 결정이 사람들의 생명과 직결될 수 있다는 점을 숙고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해외에서는 수십년째 활발히 이용하고 있는 약이 국내에선 도입조차 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1995년 처음 출시된 ‘에포프로스테놀’ 제제는 여러 국가에서 강력한 폐동맥고혈압 치료제로 꼽힌다. 하지만 한국엔 30년째 도입되지 않고 있다. 정욱진 가천대 길병원 심장내과 교수는 “한국은 시장이 작고 보험 당국이 약가를 지나치게 낮게 책정해 희귀난치성질환 신약이 발매 초기에 들어올 수 없는 구조”라며 “희귀질환에 대한 정책 당국과 심사평가원의 관심도가 낮은 것도 영향을 미친다”라고 짚었다. 정 교수는 “희귀질환에 대한 정부의 인식 제고와 신속한 급여제도 구축이 필요하다”며 “선진국인 우리나라에서 신약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이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정책 연구기관은 희귀질환 의약품에 대한 정부의 의료비 지원 폭이 확대돼야 한다고 봤다. 최은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희귀·필수의약품센터를 통해 필수의약품이나 신약이 도입되고 있지만 여전히 접근성 한계가 존재한다”며 “특히 상대적으로 환자 수가 적은 희귀질환자들은 쓸 수 있는 약이 없어 기본적인 일상생활이 힘든 사례가 많다”고 지적했다. 최 연구위원은 “정부의 노력으로 지원책이 늘어나고 있지만 여러 측면에서 개선해야 할 정책적 수요가 있다”며 “희귀·난치성질환자의 다양한 상황과 상태에 따른 맞춤형 치료 계획과 함께 의료비, 보험 급여 등을 아우르는 폭 넓은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