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인세현 기자] “소규모 영화의 장점이 최대치로 드러나는 작품” 영화 ‘걷기왕’(감독 백승화)에서 수지 역할을 맡은 배우 박주희의 말이다. 그녀의 말처럼 ‘걷기왕’은 아기자기한 연출과 뚜렷한 메시지 등 작은 영화의 장점과 매력이 고루 드러난 영화다.
강화도에 사는 만복(심은경)은 어릴 적 발견된 선천적 멀미증후군으로 세상의 모든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없다. 교통수단을 타면 구토를 동반한 멀미 증세가 심해지기 때문. 고등학교에 진학한 만복은 왕복 4시간 거리의 학교까지 걸어서 통학한다. ‘걷기를 잘한다’는 만복의 특기를 유심히 본 담임 선생님(김새벽) 추천으로 만복은 육상부에 들어가 경보를 시작하게 된다. 무엇이든 적당히 하며 살아왔던 만복에게 경보라는 새로운 트랙이 주어지고 만복은 전력을 다해 인생의 트랙을 걷기 시작한다.
‘걷기왕’은 ‘무조건 빨리 열심히’를 외치는 현 사회를 비추는 일종의 우화다. 주인공 만복이 앓고 있는 선천적 멀미증후군은 심한 멀미를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 실제 존재하는 병이 아니다. 이 설정에는 동화적 성격이 가미됐다. 약간의 속도에도 어지러운 만복은 쉽게 ‘무엇이든 적당히 하고 싶은 고등학생’의 특징을 갖는다. 만복과 대치하다가 조력자가 되는 육상부 에이스 수지, 담임 선생님, 육상부 코치(허정도), 만복의 유일한 친구인 지현(윤지원)도 마찬가지로 말투나 생김새 등으로 쉬이 캐릭터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영화에 진정한 악역은 등장하지 않는다. 만복에게 ‘그깟 멀미도 참지 못하면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윽박지르는 아버지(김광규)나 만복에게 ‘무엇이든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해야한다’고 강요하는 담임 선생님이 악역과 비슷한 역할을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악역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영화가 이들을 미워할 수 없게끔 그리는 덕분이다.
갈등을 유발하는 악역이 사라진 자리에 위치한 것은 ‘무조건 빨리 열심히’를 외치는 현 사회 분위기다. 극 중 만복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시작한 경보에 점점 빠져들며 진지하게 몰입하지만, 영화는 이 뜨거운 열정을 긍정적으로 비추지만은 않는다. 이 시대에 난무하는 열정이 과연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에 대한 몰두인지, 나를 비롯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최면인지 돌아보게 하는 것.
올해 가장 큰 흥행작 중 하나인 ‘부산행’에서 짧지만 강렬한 연기를 선보였던 심은경은 ‘걷기왕’에서 이도 저도 아닌 고등학생 만복 역할을 맡아 자연스러운 연기를 펼친다. 심은경은 기자간담회에서 “나와 닮은 만복을 연기하며 스스로 위안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소규모 영화에서 섬세한 연기를 선보였던 박주희의 호연도 눈에 띈다. 허정도, 김새벽, 윤지원, 안승균 등 출연 배우들의 연기가 신선하면서도 조화롭다. 안재홍은 극 중 만복이 기르는 소인 소순이 역할을 맡아, 목소리로 출연한다. 우정출연한 FT아일랜드 이재진의 연기도 캐릭터와 맞아 떨어져 기대 이상이다.
심은경은 시나리오를 읽고 만복의 마지막 선택에 매료돼 ‘걷기왕’ 출연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만큼 만복의 마지막 선택은 이 영화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결말에 이르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것을 열심히 전달하려 한다. 조금 더 천천히 분명하게 걸어왔다면 어땠을까. 12세 관람가. 오는 20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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