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이승희 기자] ‘박근혜 대통령 탄핵열차’가 종착역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10일 오전 11시 대심판정에서 박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의 결과를 선고하겠다”고 8일 발표했습니다. 지난해 12월9일 탄핵소추 의결서가 헌재에 제출된 이후 92일 만입니다.
박 대통령 탄핵심판 변론을 맡은 김평우(72) 변호사는 같은 날 오전 서울 종로구 헌재 정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신임 헌재소장을 임명해 9인 체제가 될 때까지 선고를 미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8인의 재판관이 하는 선고는 재판권 없는 재판부의 결정이므로 무효”라고 강조했죠.
앞서 김 변호사는 지난달 25일 ‘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탄기국)’가 주최한 14차 탄핵 무효 집회에 참석해 “내 발언이 틀렸다는 지적은 받아본 적이 없다. 그냥 ‘버릇없다’ ‘막장이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라며 “내가 쓴 책을 읽어보면 내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정말일까요? 김 변호사는 지난해 12월부터 ‘조갑제닷컴’에 기고한 글을 엮어 ‘탄핵을 탄핵한다’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그는 어떤 논리로 탄핵 기각을 주장하는 것일까요?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는 말이 있죠. 기자가 직접 읽어보겠습니다.
디자인부터 남다릅니다. 표지는 극우 보수단체의 집회 때마다 등장하는 ‘태극기’를 연상케 합니다. 투박한 디자인 앞에서 경건한 마음마저 드네요. 그럼 첫 장을 살펴볼까요?
침묵하면 안 된다 싶어 독립운동하는 심정으로 매일 같이 글을 썼다.
꽤 거창하네요. 기자 또한 독립운동하는 심정으로 책을 읽은 뒤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을 제시, 여러분과 제 생각을 공유해보려 합니다.
일본과의 수교, 고속도로 건설, 새마을사업 등 오늘날 세계인들이 찬양하는 한국의 고속 경제발전은 모두 언론과 일부 국민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박정희 대통령이 내린 힘든 결단의 결과이다. (192쪽)
한국의 고속 경제 발전은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한 결과물 아니었나요? 대한민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이들이 듣는다면 불쾌할 언사일 수 있다는 우려가 듭니다.
최순실이 공무원은 아니지만,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신뢰하여 의견을 듣고자 비서를 통하여 전달한 것이라면 대통령의 업무 행위이므로 비밀누설죄에 의율(법원이 법규를 구체적인 사건에 적용하는 것)할 수 없다. (91쪽)
공무원이 아님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비선’이라고 부릅니다. 일반인 최씨가 ‘비선’으로서 ‘국정’에 개입한 일이 문제없다는 주장에는 동의하기가 힘든데요. 선뜻 납득이 가지 않지만 조금 더 읽어보겠습니다.
대한민국 공무원 중에서 가족이나 친지, 친구를 위하여 기업체에 일자리나 일거리 부탁을 하지 않은 사람 있나? 자기네들이 일상으로 하는 건 직권남용, 강요가 아니고 박 대통령이 평생의 친구를 위해 일거리나 일자리를 부탁한 건 용서받지 못할 범죄라서 파면되어야 한다고? (95쪽)
대한민국 공무원이라면 모두 일자리 부탁을 해보았을테니 박 대통령도 무죄라는 주장입니다. 다수의 범죄자가 존재한다고 해서 범죄가 정당화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일개 기자도 청탁 목적으로 식사를 대접받으면 처벌받는 사회입니다. 김 변호사의 주장이 다소 억지스럽게 다가오네요.
공무상 비밀누설죄 소추 부분을 본다. 박 대통령이 임기 3년 동안 47건의 대외비 문서를 최순실에게 보내 공무상 비밀을 누설했다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무슨 큰 죄같이 들린다. 그러나 ‘수도권 지역 체육시설입지 선정’ 같은 정보를 가지고 공무상 비밀 누설 운운하는 것은, 국회가 대통령을 지방 시청의 주사 정도로 취급하는 것이다. (96쪽)
국토부와 청와대가 수도권 내의 체육시설 부지를 검토한 사실은 비밀로 분류됩니다. 부동산 시장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대외비 문서가 최씨에게 넘어간 후, 최씨는 해당 지역의 건물과 토지를 사들여 18억원의 시세 차익을 남겼다고 합니다. 경중을 따지기에 앞서 최씨의 행동은 처벌받아 마땅한 ‘범죄’입니다.
또한 박 대통령 역시 책임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비밀’의 사전적 정의는 ‘밝혀지지 않았거나 알려지지 않은 내용’ 또는 ‘숨기어 남에게 드러내거나 알리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아직 공표되지 않은 내용이 담긴 문서를 최씨에게 건넨 것은 명백한 비밀 누설로 여겨집니다.
시위대가 든 촛불은 누가 준비했나? 시위 주최 측이다. 촛불뿐인가? 도시락도 준비하고 일당도 주지 않았나? (물론, 돈 안 받은 사람도 많을 거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이 돈을 받았다고 믿을 만한 SNS가 말한다) (56쪽)
김 변호사는 촛불 집회 참가자들이 돈을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근거로 ‘믿을 만한 (인물의) SNS’를 들었죠. 그러나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계정인지는 자세히 밝히지 않았습니다. 구체적 근거가 없는 주장은 허언에 가깝다고 봐야 합니다.
김 변호사가 박 대통령 탄핵소추장에 있는 다섯 개 위반 사항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살펴볼까요?
대통령이 기밀문서를 외부에 보낸 행위는 법률위반이나 규정 위반이 될지는 몰라도 국민 주권주의나 대의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부정이나 공격행위, 즉 헌법위반 행위는 아니다. …대통령은 직업 공무원 제도나 평등원칙을 부정하거나 공격한 적이 없다. 따라서 헌법위반은 되지 아니한다. …박 대통령이 기업의 재산권이나 시장경제 질서, 기본적 인권 보장 제도 등을 부정하거나 공격한 적이 없다고 전술한 바 있다. 따라서 헌법위반 행위는 아니다. (79~80쪽)
'Ctrl+c'와 'Ctrl+v'로 대표되는 ‘복사’와 ‘붙여넣기’가 생각나네요. 다섯 개 요건에 대한 반박이 유사합니다. 똑같다고 봐도 될 정도죠. 김 변호사의 책은 유독 동어 반복이 많았습니다. 더 구체적인 근거가 듣고 싶을 뿐입니다.
우려되는 건 헌재가 탄핵소추를 기각하는 판결을 했을 때, 과거 노무현 대통령 때처럼 사람들이 기꺼이 승복할지 여부다. 승복하지 않는다면 그다음 수순은 무엇인가? 비상계엄인가? 아니면 광란의 유혈혁명인가? (20쪽)
(미국 탄핵 재판의 경우) 판결은 표결로 끝이다. 대들고 항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만일 헌재가 탄핵소추를 기각하면 민중혁명이 일어난다고 협박하는 발언은 미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아마 정신병자로 취급될 것이다. (131쪽)
김 변호사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다만 기자는 그와 달리 탄핵 인용 후가 걱정입니다. 그동안 극우 보수단체들은 탄핵 반대 집회에서 “(탄핵이 인용되면) 대한민국을 피바다로 물들일 것”이라는 취지의 주장을 펼쳐왔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같은 발언은 미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입니다. 김 변호사의 주장에 따르면 그렇다는 겁니다.
대통령은 나라를 대표하는 나라의 얼굴이다. 자기 집 화분 바꾸듯이 기분으로 바꾸는 게 아니다. 자기가 뽑은 대통령의 개인적 허물이 드러나도 나라의 체면을 생각해서 조용히 덮어 감싸서 명예롭게 임기를 마치도록 도와주는 게 법치 민주 국가의 국민이 해야 할 도리이다. (34쪽)
대통령의 임기를 지켜주는 것이 국민의 도리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라는 직위는 국민이 일임한 것입니다. 법치 민주 국가에서 대통령은 오롯이 국민을 위해 일하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탄핵 심판 선고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김 변호사뿐 아니라 전 국민이 ‘대통령의 도리’에 대해 고민해봐야 할 시점입니다.
PS. 한 네티즌이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탄핵을 탄핵한다’에 대한 리뷰 글을 발견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원래 이 책이 (내가 작성한) 10번째 리뷰인데, 책 같지 않은 책이라 집계에서 제외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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