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페이 같은 소리⑤] 반복되는 방송작가 임금 문제, 결정적 원인 세 가지

[열정페이 같은 소리⑤] 반복되는 방송작가 임금 문제, 결정적 원인 세 가지

기사승인 2017-09-25 06:00:00


편집자 주 : 대중문화는 우리와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영화산업 하나만 떼놓고 봐도 1년 극장 관람객 입장권 매출액은 1조 5000억원(2013년 기준)에 달하죠. 현재 한국에 사업자로 정식 등록돼있는 영화 제작사는 약 2000여개. 그만큼 규모가 큰 산업이며, 종사자도 엄청납니다. 배우들은 영화 한 회에 억 단위 개런티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외의 대중문화 종사자들은 적절한 대우를 받고 있을까요? 언뜻 화려해 보이지만 그 멋진 광경 뒤에는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합니다.  

신조어 중 ‘열정페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오로지 열정을 위해서라면 적은 돈도 개의치 않는 젊은 창작자들을 이용해, 반대로 ‘열정’을 핑계로 정당한 임금 지급을 받지 못하는 경우를 뜻합니다. 대중문화산업계에서 ‘열정페이’ 사례를 찾기는 너무나 쉽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예술인복지법 개선을 위해 나섰지만 현업 종사자들은 “제대로 대우 받으려면 멀었다”고 고개를 내젓습니다. 정당한 임금을 지급시키려 만든 제도와 ‘열정페이’뿐인 실무 간의 간극이 엄청나다는 겁니다. 뭐가 문제일까요. 산업 현장? 종사자들의 인식? 교육 환경? ‘열정페이 같은 소리’는 모두가 즐거워할만한 콘텐츠를 만들면서 정작 즐겁지 않은 대중문화 종사자들을 인터뷰하고 문제점을 알아봅니다. 현업 종사자들이 원할 경우 인터뷰는 비실명 처리됩니다. 


지난 5일 방송된 tvN 월화드라마 ‘아르곤’에는 방송국의 계약직 스태프들이 해고 위기에 처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회사 내 힘 싸움에 밀려 프로그램이 폐지될 위기에 처하자 정규직 기자들은 회사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는 반면, 10년차 방송작가 육혜리(박희본)를 비롯한 스태프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생존을 걱정한다. 방송 프로그램에 맞춰 팀 단위 계약을 맺기 때문에 이들에게 프로그램의 존폐 위기는 곧 해고 위기다.

지난 19일 방송된 SBS 월화드라마 ‘사랑의 온도’에서는 드라마 작가를 꿈꾸는 막내 보조작가 이현수(서현진)가 부당한 사유로 하루아침에 해고당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현수가 메인작가 박은성(황석정)에게 하루 휴가를 내는 과정에서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이유다. 1년이나 일한 직장에서 쫓겨나게 된 이현수에게 돌아온 건 퇴직금이 아닌 “내 작가 생활 10년에 너 같이 사악한 애는 처음”이라는 메인작가의 폭언뿐이었다. 결국 이현수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곧장 짐을 싸서 작업실을 떠난다.

드라마의 재미를 위해 지어낸 장면들이 아니다. 실제 현실에서도 수많은 방송작가들은 심각한 고용 불안 문제를 겪고 있다. 방송사와 제작사, 하청업체, 메인작가 등 수많은 갑을병정 관계의 가장 마지막에 위치한 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MBC와 KBS가 공영방송 정상화를 요구하며 총파업을 개시한 상황에서도 다수의 계약직 방송 스태프들은 소리 소문 없이 직장을 잃었다.

고용 불안보다 더 심각한 문제도 있다. 바로 임금 문제다. 임금을 예정된 기일보다 늦게 받는 정도는 가벼운 축에 속한다. 제작사 사정이 나아지면 한 번에 월급을 주겠다며 일을 시키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막내 작가들은 법으로 정해진 최저임금보다 낮은 급여를 받으면서도 다 그렇게 하면서 배우는 것이라는 얘기를 듣는다. 드라마에서도 방송 스태프들의 임금 문제가 당연한 것처럼 그려질 정도다. ‘사랑의 온도’에서 드라마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대기업 직장을 그만두고 막내 작가 생활을 시작한 이현수의 월급은 80만원이다.

최근 쿠키뉴스가 만난 공작대(공정노동을 위한 방송작가 대나무숲) 황민주 작가는 고용, 임금 문제로 고통 받는 방송작가들의 이야기를 가장 가까이에서 듣고 있는 이들 중 한 명이다. 황 작가에게 현실에서는 어떤 문제들이 발생하고 그 원인은 무엇인지, 해결하기 위해 어떤 방안들을 준비하고 있는지 자세한 얘기를 들어봤다.


△ 표준계약서는 있지만 강제성은 없다

황 작가의 말에 따르면 방송작가들이 겪는 임금 문제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건 구두 계약으로부터 비롯된 문제들이다. 작가들에게 임금을 주기로 약속해놓고 뒤늦게 말을 바꾸는 것이다. 문서로 남는 계약서는 이 같은 문제를 방지할 수 있다. 정부에서 방송 스태프를 위한 표준 계약서 양식을 만들어 배포했지만 강제성이 없다는 게 문제다. 각 방송 스태프들마다 근무 방식, 계약 형태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계약서를 보완할 필요성도 있다.

“방송 스태프 표준계약서가 존재하지만 강제성이 없어요. 문화체육부에서는 가급적 쓰라고 하는데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르는 작가들이 태반이에요. 저도 처음에 방송작가로 일할 때는 계약서를 쓰지 않는 것이 관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제 월급이 정확히 얼마인지도 몰랐죠. 다른 작가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제 월급날이 언제인지 알았을 정도예요. 공작대 일을 시작한 후에야 잘못된 관행이라는 걸 알게 됐죠. 표준계약서도 전체 스태프를 위한 것이라 명확하지 않은 편이에요. 방송작가들의 상황에 맞지 않는 조항도 있고요.”

황 작가는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더라도 임금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자리로 출근했다는 것을 증명해 노동자성을 인정받는 것이다. 노동자성의 인정 여부에 따라 임금 체불이 일어났을 때 해결방식이 완전히 달라진다.

“노동자성을 인정받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임금 체불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결 방법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이에요. 노동자로 인정받으면 노동부에 진정을 넣어서 임금 지급 명령을 받을 수 있지만, 인정받지 못하면 민사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거든요. 임금 체불이 아니라 채무·채권 소송이 되는 거죠. 계약서를 쓰지 않았더라도 정해진 장소로 정해진 시간에 출근했고 방송국이나 제작사의 지시를 받았다는 점을 충족시키면 노동자성이 인정된다는 판례가 있어요. 연차가 낮을수록 상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노동자성을 인정받을 가능성이 커요. 그래서 임금 문제가 일어날 경우를 대비한 캠페인도 준비하고 있어요. 매일 출근해서 자기가 일하는 자리를 사진으로 남기는 거예요. 그러면 정해진 시간마다 출근했다는 기록이 되거든요.”


△ 하청에 또 하청… 불분명한 책임 소재도 문제

제대로 계약서를 작성했음에도 임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방송 스태프들의 계약 관계가 복잡한 것을 이용해 임금을 줘야할 책임을 회피하는 이들 때문이다. 방송작가는 프로그램이 방송되는 방송사가 아닌 외주로 일을 받는 제작사와 계약을 맺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황 작가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실제 사례 몇 가지를 소개했다.

“비슷한 사례가 두 건 있는데 둘 다 뷰티 프로그램이에요. 보통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은 방송사가 제작사에 제작비를 지급하고 만들지만, 뷰티 프로그램은 제작사가 송출료라는 개념으로 방송사에 돈을 주고 방송해 달라고 요청하는 형식이에요. 제작비를 100% PPL(Product PLacement, 간접광고)로 충당하거든요. 그래서 뷰티 프로그램 제작사는 제작비와 송출료를 합친 금액을 광고로 따와야 하죠.

A 프로그램은 제작사가 송출료를 내지 못해서 예정된 회차보다 일찍 종영된 케이스예요. 이미 방송 준비부터 촬영까지 다 끝낸 상황에서 제작사가 제작비를 못 받았다며 돈을 지급해주지 않았어요. 일찍 종영된 건 제작사 때문인데 그 책임을 스태프들이 떠안게 된 거죠. B 프로그램의 경우는 PPL을 담당하는 C 제작사가 D 제작사에 제작 하청을 줬어요. 그런데 D 제작사가 돈이 없어서 작가들에게 원고료를 못 준다고 하는 거예요. 제작사에 연락도 잘 안 되고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있는 상황이죠. 또 어떤 제작사는 돈이 없어서 임금을 못 주겠다며 작가들에게 나갔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제작사가 몰래 새로운 작가팀을 꾸리고 있었던 거예요. 방송을 계속 해야 제작비를 받을 수 있으니까 임금이 체불된 작가들을 내쫓고 새 팀을 꾸린 거죠.

공작대에서는 임금 체불 문제가 자주 발생하는 제작사 리스트를 만들 계획도 세우고 있어요. 보통 방송국에서 외주를 맡길 제작사를 선정할 때 공개 모집을 통해서 하거든요. 그 때 저희 리스트에 있는 제작사에 페널티를 부과하거나, 후보에서 제외하라고 방송사를 압박하는 거예요. 또 표준계약서 작성이 의무화되면 외주 제작사의 스태프 계약서를 방송국에 넘기거나 증빙해야 하는 조항도 넣을 방안도 추진하고 있어요.”


△ 방송작가들이 소송을 꺼리는 이유

황 작가는 전국에서 일하는 방송작가들이 대략 1만 명 정도로 추산될 뿐 정확한 인원수를 가늠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방송작가는 특수고용으로 분류되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회사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고 근무 형태도 제각각이라 단체 활동을 하기 어렵다. 수많은 방송작가들이 적은 임금과 부당한 계약, 임금 체불 문제를 겪으면서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유다.

“임금 체불 문제가 생기면 기사화해서 더 많이 알렸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공론화를 부담스러워 하는 분들이 더 많아요. 아무래도 방송작가는 인맥의 영향이 크거든요. 회사에 소송을 걸었던 사람이라고 알려지면 다른 곳에 갔을 때 불이익을 받을까 하는 걱정을 많이 하세요. 실제로 소송으로 임금을 받아내더라도 다른 제작사에서 채용하기를 꺼려하는 경우가 생겨요. 누가 소송을 했는지 제작사들끼리 다 공유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황 작가도 공작대에서 상근으로 일하면서 나중에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더 컸다. 과거 임금 체불을 경험하고 막막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황 작가는 마지막으로 방송작가들에게 함께 모여서 바꿔보자는 메시지를 전했다.

“혼자 해서는 전혀 바뀌지 않을 것 같아요. 공작대 활동을 하면 할수록 다 같이 모여서 하면 더 많은 것들이 바뀌지 않을까 생각해요. 방송작가는 박봉에 초과근무를 하는 어려운 직업으로 비춰지곤 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자부심을 갖고 일하시는 분들도 많아요. 저도 그렇고요. 저희의 이야기를 많은 분들과 직접 만나서 같이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열정페이 같은 소리⑥에서 계속)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 사진=tvN, SBS 캡쳐, 박효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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