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페이 같은 소리⑥] 이름 없는 방송작가들의 목소리

[열정페이 같은 소리⑥] 이름 없는 방송작가들의 목소리

이름 없는 방송작가들의 목소리

기사승인 2017-09-29 06:00:00


편집자 주 : 대중문화는 우리와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영화산업 하나만 떼놓고 봐도 1년 극장 관람객 입장권 매출액은 1조 5000억원(2013년 기준)에 달하죠. 현재 한국에 사업자로 정식 등록돼있는 영화 제작사는 약 2000여개. 그만큼 규모가 큰 산업이며, 종사자도 엄청납니다. 배우들은 영화 한 회에 억 단위 개런티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외의 대중문화 종사자들은 적절한 대우를 받고 있을까요? 언뜻 화려해 보이지만 그 멋진 광경 뒤에는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합니다.  

신조어 중 ‘열정페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오로지 열정을 위해서라면 적은 돈도 개의치 않는 젊은 창작자들을 이용해, 반대로 ‘열정’을 핑계로 정당한 임금 지급을 받지 못하는 경우를 뜻합니다. 대중문화산업계에서 ‘열정페이’ 사례를 찾기는 너무나 쉽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예술인복지법 개선을 위해 나섰지만 현업 종사자들은 “제대로 대우 받으려면 멀었다”고 고개를 내젓습니다. 정당한 임금을 지급시키려 만든 제도와 ‘열정페이’뿐인 실무 간의 간극이 엄청나다는 겁니다. 뭐가 문제일까요. 산업 현장? 종사자들의 인식? 교육 환경? ‘열정페이 같은 소리’는 모두가 즐거워할만한 콘텐츠를 만들면서 정작 즐겁지 않은 대중문화 종사자들을 인터뷰하고 문제점을 알아봅니다. 현업 종사자들이 원할 경우 인터뷰는 비실명 처리됩니다. 


방송작가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신문에서도, 방송에서도 작가들이 직접 자신이 겪은 부당한 일들을 폭로하거나 시위하는 모습을 접하긴 어렵다. 실제로 취재 과정에서도 부당한 일을 겪은 방송작가들이 공론화를 망설이는 모습을 목격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목소리를 높이고 힘을 모은다고 해도 변화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회의적인 분위기도 있고, 계약서 없이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법적인 활동을 하기 어렵다는 이유도 있다. 현자 얼마나 많은 방송작가가 어떤 부당한 일들을 겪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가장 큰 이유는 이름 때문이다. 어느 분야에서든 내부의 썩어빠진 구조를 밖으로 드러내고 알리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이름이 필요하다. 적어도 어떤 작가가 주장을 하는지, 누가 공론화에 동조하는 목소리를 냈고 참여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어야 문제가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은 망설일 수밖에 없다. 방송작가에게 이름은 곧 자신의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밥줄을 걸고 방송작가의 환경 개선을 위해 싸우기는 쉽지 않다. 이후에도 작가 생활을 하고 싶다면 조용히 참고 넘어가는 것이 낫다.

그렇게 수많은 임금 체불과 법정 공방이 어둠 속에 묻혔다. 그럼에도 방송작가들의 이야기는 전해져야 한다. 전체 이야기를 밝힐 수 없다면 일부분이라도, 구체적으로 말하기 어렵다면 할 수 있는 데까지라도 설명해야 사람들이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작은 변화라도 시작될 여지가 생긴다.

최근 쿠키뉴스는 네 명의 방송 작가와 익명을 전제로 서면인터뷰를 진행했다. 10년 가까이 드라마 보조 작가로 일한 A, 14년차에 접어든 교양 구성작가 B, 2~3년 동안 예능 막내 작가로 일한 C와 D까지 분야와 연차 모두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계약서는 방송작가에게 낯선 단어”

먼저 궁금했던 건 계약에 관한 것이었다. 계약서는 쓰는지, 쓰지 않았다면 어떤 방식으로 계약을 하는지, 그 주체는 누구인지 물었다. 복잡하다고 소문난 방송작가의 계약 구조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일단 네 작가 모두 계약서는 쓰지 않았다. B 작가는 “작가들에게 먼저 계약서를 내미는 방송국이나 프로덕션은 본 적이 없고 나 또한 요구해본 적이 없다”며 “작가들 사이에서는 계약서를 요구하지 않는 암묵적 약속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A 작가의 경우에도 “계약하기에 애매했다”고 털어놨다. 작가교육원에서 만난 선생님의 도와달라는 부탁으로 보조 작가 일을 시작하게 됐기 때문이다. 지인의 부탁을 계약서 얘기로 받아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C 작가와 D 작가도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일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 “120만원을 네 명이서 30만원씩 나눠가진 적도”

계약 방식이나 주체는 각자의 분야에 따라 모두 제각각이었다. 예능 프로그램에 참여한 D 작가는 팀에 소속돼 있었다고 말했다. 메인 작가와 서브 작가, 막내 작가로 팀을 구성해 제작사와 팀 단위 계약을 맺었다는 얘기였다. 팀을 대표해 메인 작가가 제작사와 계약을 맺고 서브 작가와 막내 작가들은 메인 작가에게 월급을 받는 구조였다. 계약서를 쓰거나 세금을 낼 이유가 없었다. D 작가는 다행히도 월급을 잘 챙겨주는 메인 작가 덕분에 임금 체불을 겪진 않았다. 다만 “주변 사람들이 돈을 늦게 받는 경우는 많이 봤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메인 작가가 누구냐에 따라 임금 체불은 누구든 겪을 수 있는 일이었다.

예능 프로그램을 맡았던 C 작가는 방송사와 계약을 맺었다. 방송 출연자와 함께 작가 고료를 정산 받는 식으로 월급을 받았다.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B 작가는 프로그램 편수에 따라 임금을 받았다. 한 프로그램을 위해 팀 단위로 움직이더라도 모두 각자 임금을 따로 받았다고 말했다.

드라마 보조 작가로 일했던 A 작가는 상황이 가장 열악했다. 제작사에서 보조 작가 비용으로 책정한 120만원을 네 명이서 30만원씩 나눠가진 적도 있었다. 메인 작가에게 불만을 토로해도 ‘나도 어렵다’, ‘미안하다’는 말이 돌아왔다.

A 작가는 “메인 작가가 방송사의 편성을 받으면 돈을 준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사실 편성을 받는 게 정말 힘든 일이라 계속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함께 보조 작가로 일하던 언니들과 우리가 2년 동안 얼마를 받았는지 계산해봤더니 500만원이 안되더라”라고 말했다. 집에 손 벌리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는 작가들은 결국 각자 시간을 내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 “밥하고 청소하는 건 기본이었다”

임금과 계약 문제 외에도 방송작가들이 겪는 어려움은 많았다. A 작가는 “작업실에서 밥을 하거나 청소를 하는 건 기본이었다”며 “외국에서 온 메인 작가의 딸에게 관광을 시켜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C 작가 역시 상사의 개인적인 일을 도운 적이 있었다. 업무와 관계없는 연락처를 알아내거나 홍보 책자를 구해오는 등의 일이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부당한 일이라고 느꼈다. C 작가는 “메인작가에게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지만 참으라는 말을 들었다”며 “일에 대해 많은 회의감이 들었다”고 떠올렸다.

B 작가는 방송작가들의 업무 강도에 대해 지적했다. B 작가는 “우리는 일반 회사원들보다 일하는 시간이 많다”며 “쉬는 날이 정해져 있지도, 쉬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도 않다. 방송 전에는 밤샘이 기본이고, 촬영이 엎어지거나 아이템이 변동되면 한 달 내내 하루도 쉬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설명했다.

D 작가는 “하나의 방송 프로그램을 많은 팀들이 함께 만들다 보니 출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서 개인 시간이 없다”며 “지인을 만날 때도 항상 노트북을 챙기고 다녀야 하고 주말과 평일의 경계, 낮밤의 경계가 없어진다. 심각한 수준”이라고 고충을 털어놨다.


△ “10년 뒤를 생각하며 참았다”

방송작가들을 둘러싼 이 같은 환경이 만들어진 원인, 개선되지 않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A 작가는 관계가 서로 얽혀있는 구조를 언급했다. 서로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불만을 전하기도 어렵고 사정을 이해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는 얘기였다.

B 작가는 법적인 제도가 미비한 점을 꼽았다. B 작가는 “제작사가 갑자기 폐업신고를 해 밀린 임금을 받지 못하거나, 갑자기 약속한 금액을 줄이는 일을 겪었지만 법적으로 다툴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어차피 유리하지 않을 거라는 이유였다. 제작사를 신고해도 다시 그곳에서 일을 하기 어렵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C, D 작가는 당연히 적은 임금을 받는 거라는 인식이라고 말했다. C 작가는 “법정 최저 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받고 일했는데, 업계에서는 경력 없는 막내작가가 그 정도 받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 있다”며 “10년 뒤를 생각하며 참았다”고 털어놨다. D 작가 역시 “작가가 할 일이 아닌 것 같은 일을 해도 당연히 해야 되는 건 줄 알고 일했다”고 덧붙였다.


△ “밥줄을 걸고 나설 작가가 얼마나 있을까”

앞으로 방송작가의 환경이 나아질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들은 고개를 저었다. D 작가는 “방송작가의 환경에 대해 생각하면 치가 떨리고 포기한 상태”라며 “방송작가가 된 것을 후회한다. 곧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C 작가 역시 “안정적인 삶을 찾는다면 방송작가는 추천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B 작가는 작가들이 현실을 바꾸기 위해 나설 가능성이 적다는 얘기를 꺼냈다. B 작가는 “같은 곳에서 일 년을 일해도 퇴직금 받을 생각을 해보지 않았고, 말 한 마디로 잘리기도 하지만 이 같은 고용 불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며 “왜냐하면 우리의 직업상 이건 당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자신의 밥줄을 걸고 적극적으로 나설 작가가 얼마나 있을까 싶다”고 전했다.

A 작가는 잘못된 문화를 견디고 버티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드러냈다. A 작가는 “드라마를 배우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거나, 오히려 내가 돈을 받아야 된다고 하는 분도 봤다”며 “꿈을 위해서 참고 버티는 보조 작가들도 많은데, 그런 말에 기대서 버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드라마 업계에서 ‘열정페이’가 점점 사라질 것 같다”고 말했다.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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