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의 위기 분쟁의 미래] 태국, ‘10월의 달력’ 바뀔까

[공존의 위기 분쟁의 미래] 태국, ‘10월의 달력’ 바뀔까

‘탐맛삭 학살’ 금기의 역사

기사승인 2017-10-15 00:05:00


태국의 10월은 역사적 사건이 빼곡하다. 41년 전인 1976106일 방콕 탐맛삭 대학에선 3년 전 쫓겨난 군인 독재자 따놈 끼티카촌(Thanom Kitticachon)의 귀국 반대 시위를 하던 학생들이 군과 민병대에 의해 학살당했다.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으며 어떠한 정권도 진상조사를 진척시키지 못했다. ‘탐맛삭 학살’(‘106을 가리키는 혹뚤라로 불리기도 함)은 태국 현대사의 최대 금기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확인된 사망자는 40여명이지만 수백 명이 희생당했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부상자는 3000명 가량으로 추산됐다.

독재자 따놈이 쫓겨난건 19731014일이다. 그는 시민과 학생들의 퇴진 요구에 압박을 받다가 푸미폰 전 국왕의 명령으로 미국으로 망명했다. ‘십시 뚤라’(1014일이라는 뜻)로 불리는 이 항쟁의 대미는 그해 같은 달 13일에 있었다. 당시 수십만 명이 방콕 라차담넌 도로를 행진했다. 대열의 앞에는 푸미폰 전 국왕 내외와 불교 최고 지도자인 승왕, 그리고 불교의 깃발이 펄럭였다.

탐맛삭 대학 학생운동 지도자였던 섹센 파세쿤(Seksen Paserkul, 현재 작가로 활동하고 있음)은 시위대를 이끌고 국왕에게 조언을 구하고자 왕궁을 향해 행진했다. 시위대는 민주주의를 염원했지만, 왕실·불교·국가 등 체제를 수호하는 3대 기둥에 저항한 것은 아니었다. 따놈이 물러나자 즉각 후속 총리를 임명한 것도 국왕이었다. 탐맛삭 대학 법대 학장 출신의 판사 사냐 다르마삭티(Sanya Dharmasakti)는 독재자 따놈의 뒤를 이은 총리로 임명됐다.

탐맛삭 학살 발생 전 3년 동안은 태국 현대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73년 독재자를 축출한 경험은 시민들에게 크나큰 성취감을 안겼다. 이전 26년 동안 단 한 번도 민간정부를 경험하지 못했던 이들이었다. 미국의 동남아 반공전선에서 매우 효율적인 인물이었던 군인 사릿 따나랏(Sarit Thanarat, 이하 사릿)57년 쿠데타로 정권을 거머쥔 이후, 73년 따놈이 쫓겨날 때까지 태국은 총 7번의 성공하거나 실패한 군사 쿠데타를 경험했다. 따놈이 물러나자 각계각층에서 민주적 요구와 주권 찾기가 폭발적으로 쏟아졌다.


당시는 급진화 되던 노동자와 농민들에 대해 정치적 암살이 횡행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학생·노동자·농민은 더 이상 73년의 체제 순응적 민주세력만은 아니었다. 기득권 세력은 이들을 반체제 세력으로 인식했다. 태국의 동북부에서 마오이즘의 영향을 받은 타이공산당(CPT)1965년부터 무장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단 점은 이념적 대립 및 탄압을 심화시켰다.

가령, 19743월부터 19758월까지 암살당한 태국농민연맹(FFT) 지도자만 21명이었다. 주로 치앙마이 등 북부 지역 농민들이 암살 대상이 됐다. 그리고 76925일 두 명의 노동운동가가 안티 따놈선전물을 돌렸다는 이유로 또 암살당했다. 이들은 나무에 목이 매달린 채로 발견됐다. 이 장면이 104일 탐맛삭 대학 학생들의 정치 풍자 연극으로 재현됐고 5일 이 연극에 대한 기사가 현지 신문 1면 머릿기사로 오르면서 긴장은 더욱 고조됐다. 신문에 실린 사진 속 배우가 우연하게도 와지라롱콘 당시 왕세자(현 국왕)와 닮았기 때문이었다. 6일 탐맛삭 학살이 벌어지기까지 태국은 혁명과 반동의 기운으로 엎치락뒤치락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시기 독재자와 손잡고 증오 스피치와 폭력적 캠페인에 동참한 세력 중에는 태국의 극우 성향의 전투적 불교가 포함됐다는 점이다. 극우 승려들은 극우 민병대 빌리지 스카웃의 정치교육을 담당하기도 했다. 당시 극우 승려로 악명을 날린 끼띠 우도는 그해 짜뚜랏(Chatturat)이라는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공산주의자를 죽이는 것은 책망 받을 일(demeritorious)이 아니라고 말했다. 또 공산주의자 살해를 두고 승려를 위해 물고기를 죽여 생선요리를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물고기를 죽이는 것은 작은 죄이지만 승려에게 시주하는 것이 더 큰 선이라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76919일 독재자 따놈이 승려가 되겠다며 귀국했다. 그는 왕실 관리 사원중 하나인 방콕의 보웬니웬 사원으로 직행했다. 3년 전 이룬 민주화가 원점으로 돌아갔다고 여긴 시민들과 학생들은 분노는 폭발 일보직전이었다. 그리고 탐맛삭 학살이 발생했다. 

증오 스피치, 폭력적 캠페인에 동참한 태국의 전투적 불교

탐맛삭 학살은 체제와 금기를 깬 저항이 짓밟힌 역사로 기록된다. 태국 시민단체나 일부 개인들은 이 학살을 잊지 않기 위해 그동안 추모행사와 관련 행사를 조촐하지만 꾸준히 개최해왔다. 그러나 올해 혹뚤라는 조용히 지나갔다. 10월의 항쟁 역사가 모두 그렇게 흐를 분위기다. 이유는 두 가지로 분석된다.

첫째, 2014년 쿠데타 이후 아직 민정이양을 하지 않는 프라윳 군정 체제하에서 표현과 집회의 자유는 극도로 악화됐다. 지난 3년 동안 반군정 인사들은 대거 망명길에 올랐고, 태국 내 시민사회는 극도로 무기력해져 있다. 체제도전으로 비쳐진 금기의 역사를 추모하고 토론하는 것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난제가 됐다. 106일 다큐멘터리 동호회인 다큐멘터리 클럽이 혹뚤라 시대를 다룬 영화 ‘The Time it Gets Dark’을 상영하려 했지만, 당국은 이마저도 상영을 불허했다.

둘째, 지난 해 1013일 푸미폰 전 국왕이 사망하면서 태국의 10월은 이제 민주주의와 혁명의 역사보단 체제의 심장부에 굳건히 자리 잡았던 전 국왕의 서거일로 기억될 공산이 크다. 오는 26일 태국은 푸미폰 국왕의 대대적인 장례식을 앞두고 있다. 당국의 방침에 따라 여러 기관과 상점들은 비즈니스를 축소하거나 추모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67년간 태국의 국부로 존재해온 푸미폰 전 국왕의 죽음은 이제 10월의 역사 속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10월의 역사를 꼼꼼히 챙겨왔던 이들도 지난 해 푸미폰 전 국왕 사망 이후, 추모 분위기를 고려해 훅뚤라 추모를 자제하도록 압박을 받고 있다.”


출라롱콘 대학 정치학과 푸앙통 파와카판(Puangthong Pawakapan) 교수의 말이다. 푸앙통 교수는 지난 달 24‘Documentation 6 Oct’라는 사이트 구축을 주도했다. 이 사이트는 단 한번도, 단 한 명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한 탐맛삭 학살의 희생자들과 그날을 기억하는 이들을 찾아 증언을 담고 기록하는 프로젝트 사이트다.

그는 1014일의 항쟁과 106일 탐맛삭 학살은 방치된 역사로써, 일반 시민들과 학생들은 잘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이 역사가 잊힐지는 민주 진영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며 자성적 시각을 내비쳤다.

주류의 역사, 국가가 주도하는 역사에 맞서 경쟁하려면, (시민사회가) 더 적극적으로 활동할 필요가 있다. 시민들의 기억을 지우려는 태국 정치 엘리트들의 시도에 맞서야 한다.”

태국 방콕=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lee@penseur21.com

이유경 기자
lee@penseur21.com
이유경 기자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추천기사
많이 본 기사
오피니언
실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