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상비약은 되고 원격의료는 안 되나

[기자수첩] 상비약은 되고 원격의료는 안 되나

기사승인 2017-12-11 06:33:47
보건의료계에는 금기어가 몇 있다. 황우석 박사 사건으로 인해 연구영역에서는 ‘줄기세포’가 대표적이다, 의료영역에서는 의료서비스의 영리화와 관련된 ‘의료산업화’, ‘원격의료’, 의료인력 배출과 수급, 법률적 논란의 중심에 선 ‘PA(전문간호사)’ 등이다.

의약계 금기어는 의약사간 주도권 싸움의 핵심인 ‘성분명처방’, 가족경영ㆍ형제경영이 주를 이뤄온 제약업계의 분위기가 반영된 ‘M&A(인수합병)’ 등이다. 그리고 ‘안전상비의약품 약국 외 판매’ 또한 정책영역에서 터부시돼왔다. 편의성을 위해 안전성을 일부 포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금기어들이 언론을 비롯해 정책 영역에서 차츰 거론되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 박근혜 정부 시절 국회를 중심으로 ‘서비스발전기본법’을 필두로 의료산업화와 원격의료에 대한 언급이 많이 이뤄졌다. 

얼마 전에는 안전상비약 품목조정을 두고 대한약사회와 보건복지부 간의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논의과정에서 안전상비약 품목확대에 반대한 약사회 임원이 자해를 하는 소동까지 일며 세간에 관심이 증폭되기도 했다.

분명 사회가 발전하고 변하면 사회적 요구 또한 달라져 금지되던 것들도 허용되곤 한다. 이 과정에서 변화를 원하는 집단과 원하지 않는 집단 간의 진통도 따른다. 따라서 정책을 결정하고 제도를 운영하는 정부는 뚜렷한 명분과 명확하고 일관된 판단기준으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결정을 내려야한다. 

문제는 원격의료의 추진과정과 안전상비약 품목조정과정은 서로 닮았지만 결과는 다른, 의아한 모습이 연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복지부는 영리적 목적을 배제한 의료취약지역이나 의사와 의사 간 원격의료만을 허용하겠다는 입장을 거듭 강조해왔다. 환자들의 의료접근성이 높은 상황에서 오진의 위험이 있는 원격의료를 허용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반면, 안전상비약 약국 외 판매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듯하다. 복지부는 품목조정을 위해 전문가들이 모인 위원회에서 결정된 사항을 따를 뿐이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알려진 바에 따르면 위원회는 판매가능폼목을 확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는 분위기다.

심야ㆍ야간 및 공휴일의 필수의약품 구매가 어려운 만큼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의약품의 품목을 확대해 국민의 편의를 증진시켜야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원격의료에서는 편의성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의약품에서는 반대로 편의성을 강조하는 모습이다.

이에 대해 약사회는 편의점에서의 의약품 부작용 보고가 증가하고 의약품 판매와 관련된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국민 편의를 위해 건강의 위험을 방치하는 처사를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과연 원격의료와 안전상비약 품목조정 간에는 국민의 건강과 편의성이라는 이해관계의 상충 외에 어떤 점이 다를까. 왜 정부와 위원회는 두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가치판단을 하려는 것일까. 약사회 주장처럼 공공심야약국을 지원해 안전성과 편의성을 모두 해결할 수는 없을까.

정부도 원격의료 시범사업을 추진하며 시범사업의 대상과 범위를 군대와 섬지역 등 의료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으로 한정했다. 그렇다면 같은 기준에서 안전상비약 약국 외 판매 또한 추진하지 않거나 취약지에서만 허용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품목을 확대하고 편의성을 증진시키려는 판단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편의성의 증진을 위해 품목 확대를 한다면 원격의료 또한 같은 기준에서 심야ㆍ야간 시간대나 공휴일의 의료접근성이 떨어지는 경우 담당주치의 혹은 보건소에서 원격의료 등을 통해 상담이나 간단한 진단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보인다.

안전상비약 약국 외 판매는 당초 개인에게 비교적 안전한 의약품 중 흔히 필수의약품이라는 품목을 정해 복용을 편하게 하면서도 의약품의 부작용과 같은 위험 또한 개인의 선택에 맡기는 정책이다. 심지어 식후 또는 식전 30분이라는 복약지도조차 받지 못한 채 전적으로 개인이 책임을 지는 구조다. 

분명 올바른 의약품 판매방식은 아니다. 정부 또한 편의성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인정한다. 그럼에도 이 같은 제도가 계속 유지돼야한다면 적어도 국민이 공감하고 전문가가 이해할 수 있는 동일한 잣대와 기준이 적용돼야 한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일반 대중은 편한 것을 추구한다. 그것이 확률적 위험을 내포하더라도 크게 생각하지 않거나 자신의 일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경향도 보인다”면서 제도나 정책결정 과정에서 이 같은 대중의 성향을 고려해야한다는 뜻을 전한 바 있다.

이 관계자의 말처럼 대중의 요구라며 편함만을 추구하는 결정을 해서는 안 된다. 부모가 자녀의 게임이나 스마트폰 사용을 제한하는 행동이나, 군대에서 드론 조종사들의 심리치료와 정신건강을 신경 쓰는 것처럼 무엇이 옳고 바른 길인지를 고민하고 결정해야할 것이다. 그것이 건강이나 생명과 연관될 것이라면 더욱 조심해야할 것이다.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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