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포착] 우키시마호 참사

[키워드포착] 우키시마호 참사

기사승인 2017-12-18 17:59:21


김민희 아나운서 ▶ 키워드 포착 시작합니다. 먼저 이 시간 함께 할 이승희 기자와 인사 나눠볼게요. 이승희 기자, 안녕하세요.

이승희 기자 ▷ 네. 안녕하세요. 키워드 포착의 이승희 기자입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네. 오늘은 좀 특별한 시간 준비되어 있다고 들었어요. 

이승희 기자 ▷ 네. 제가 오늘 전해드릴 내용은, 사회뿐 아니라 우리 역사와도 관련된 내용인데요.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일제 강제동원의 역사와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지난 4월부터 약 5개월간 관련 내용을 취재했습니다. 전국을 돌며 강제동원 피해자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일본 현지를 방문해 비극의 흔적도 되짚어봤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내용이고, 저 역시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중요한 이야기들만 간추려서, 앞으로 4회에 걸쳐 전해드릴 예정입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네. 키워드 포착은 앞으로 4회에 걸쳐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의 이승희 기자, 심유철 기자와 함께 일제 강제 동원에 대한 내용으로 진행합니다. 오늘은 그 중 첫 번째 시간인데요. 이승희 기자, 오늘 제시할 키워드는 무엇인가요?

이승희 기자 ▷ 네. 오늘 제가 제시할 키워드는, 우키시마호 참사입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네. 1945년 8월24일에 일어난 참사. 하지만 이 참사에 대해 해결하려고 노력하며 관심을 가지기는커녕 잘 모르고 있다는 점이 부끄러운데요. 오늘 이 시간을 통해 많은 분들이 우키시마호 참사에 대해 알고, 또 관심을 갖기를 바랍니다. 이승희 기자, 먼저 이 우키시마호 참사는 어떤 참사인지부터 정확히 알려주세요. 해방 직후 바다 한복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이승희 기자 ▷ 우키시마호 참사에 대해서 먼저 간략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키시마호 참사는, 1945년 8월24일, 한국인 피징용자를 태운 일본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호가,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로 침몰한 사건을 말합니다. 일본이 항복 선언을 하고 일주일 뒤인, 1945년 8월 22일 오전 10시, 우키시마호는 조선인 8000여명을 태우고 부산항으로 향하게 되는데요. 항해 도중인 24일, 갑자기 방향을 틀어 교토부 마이즈루 항으로 기항하는 중, 폭발과 함께 침몰했습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바다에서 폭발과 함께 배가 침몰했으니, 탈출구가 없는 상태였고, 또 본국으로 돌아가려는 강제 동원 조선인들이 배에 탑승해 있었을 테니. 꽤 많은 희생자가 나왔을 텐데요.

이승희 기자 ▷ 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의견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의 공식 발표에 의하면, 사망자는 524명입니다. 하지만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최대 8000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그 많은 인원이 바다에 그대로 수장되어 버린 건데요. 그래도 생존자가 있군요?

이승희 기자 ▷ 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배에는 8000여명이 탑승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중 1000여명 정도가 생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요. 현재 우키시마호 생존자 중 연락이 가능하며, 흐릿하게나마 증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93세인 이철우씨가 유일합니다. 기획취재팀이 직접 만난 결과, 이씨는 그 날의 일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70년이 넘은 일이지만, 또 기억하기도 싫은 그 날의 일이겠지만, 그래도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이기도 할 텐데요. 90대의 생존자는 그 날의 사건에 대해 어떻게 증언하고 있는지 궁금해요. 그 내용. 이야기해주세요.

이승희 기자 ▷ 증언에 따르면, 갑자기 꽝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두 동강 났고, 사람들은 난간과 돛대 등을 붙잡고, 인간 띠를 만들며 버텼다고 합니다. 맨 윗사람이 손을 놓치자, 함께 매달려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요. 돛대에 매달렸던 이씨는 이를 악물고 버틴 끝에, 민간 어선에 구조되었다고 합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광복이 되어 그리운 고향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부푼 마음으로 배를 탔던 사람들이 그 희망을 품은 채 바다에 빠져버린 건데요. 그 후, 긴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 배가 두 동강 난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는 거죠?

이승희 기자 ▷ 네. 맞습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사망자가 500여명이라고 밝혔을 뿐, 정확한 탑승자 명단과 사고 경위를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또 사고 후 수년 동안, 선체 인양과 유해 수색을 미루는 등, 부실 대응으로 일관했는데요. 일각에서는, 일본이 고의로 사고를 냈다며 의혹이 제기했습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8000여명의 조선인이 타고 있는 배를 일본이 고의적으로 폭발시켜 침몰하게 했다는 건가요? 어떤 근거가 있는 내용의 주장인지 알려주세요.

이승희 기자 ▷ 우키시마호가 일본군에 의해 고의로 폭침됐다는 증언이 나온 건데요. 침몰 원인을 밝히는 핵심 증거는, 바로 생존자들의 증언입니다. 20여년간 일본을 오가며 생존자들의 증언을 모아온, 전재희 우키시마호 폭침 진상규명회 회장에 따르면, 생존자였던 고(故) 주윤창씨가 그와 관련된 증언을 했다고 합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그 배에 탑승했었고 살아남았으니 믿을만한 내용일 텐데요. 어떤 증언인가요?

이승희 기자 ▷ 주씨는 일본 헌병 미나미가, 배 밑 부분에 폭탄의 전기선이 늘어져 있는 것을 절단하려 했으나, 기구가 없어서 자르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그러니까 우키시마 호에 이미 폭탄이 설치되어 있었고, 일본군이 그 선을 잘라 일부러 폭파시켰다고요?

이승희 기자 ▷ 네. 그렇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이후, 해군에서 근무했던 한 일본인은, 기관실 옆 창고에 폭발물이 설치돼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는데요. 폭발 직전 일본 해군들이, 구명보트를 타고 배를 미리 빠져나갔다는 증언도 이어졌습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배가 폭발할 것을 미리 알고 있던 일본군은 먼저 빠져나갔다는 건데요. 그 주장이 사실이라면, 폭발 후 당연히 인명구조도 하지 않았겠군요.

이승희 기자 ▷ 네. 물론입니다. 우키시마호가 침몰된 위치는, 일본 해군기지에서 불과 300여m 떨어진 곳이었지만, 해군은 구조를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바로 앞에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구조를 하지 않은 일본군. 생존자의 증언이 아니더라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정황인데요. 그 주장에 대해 일본의 반응이 궁금해요. 우키시마호 참사의 원인에 대해 일본은 뭐라고 말하고 있나요?

 이승희 기자 ▷ 자신들의 잘못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우키시마호가, 미국의 기뢰에 의해 폭파됐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그러니까 자신들이 아닌, 미군 때문이라는 거죠?

이승희 기자 ▷ 네. 그렇습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정말 일본의 주장처럼 미군의 기뢰에 의해서 우미시마호가 폭발해 침몰했을 가능성도 있는 건가요?

이승희 기자 ▷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군에 의해 폭발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만약, 기뢰에 의한 폭발이라면 물기둥이 치솟아야 하는데요.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물기둥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 폭발 당시 우키시마호는, 완전히 멈춰선 상태였습니다. 감응 기뢰는 수압이나 직접 접촉으로 폭발하고, 음향 기뢰는 기관 소리에 반응하는데, 우키시마호는 이 모든 것에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참사 원인을 밝힐 가장 중요한 증거는 바로 생존자들의 증언인데요. 생존자들의 증언은 일본의 주장을 뒷받침 해주고 있지 않군요. 

이승희 기자 ▷ 네. 그렇습니다. 게다가 우키시마호의 출항 배경도, 고의 폭침 의혹을 뒷받침하고 있는데요. 당초 일본 정부는, 8월이 아닌 9월 중순부터, 조선인들을 돌려보낼 계획을 세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본 해군성은 패전 3일 후인 1945년 8월18일, 느닷없이 조선인들을 즉시 부산으로 송환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그런 의심스러운 출항 배경도 일본의 고의 폭침을 뒷받침할 근거가 될까요?

이승희 기자 ▷ 일본 측 자료에 따르면, 조선인 해군 군속들이 고국으로 보내달라며, 불온한 조짐을 보였다고 하는데요. 패전 직후 제 앞가림도 버거웠던 일본군이, 한국인들을 고향에 보내주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군함을 움직였다는 이야기를 믿을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그러게요. 전쟁에 진 나라가 그런 호의를 베풀 정도의 상황이 되었을까요?

이승희 기자 ▷ 네. 맞습니다. 일본의 주장에 신빙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실제로 갑작스런 출항 명령이 떨어지자, 우키시마호의 일본 해군 병사들조차, 부산에 가면 연합군 포로가 된다면서, 항명소동을 벌였다고 전해졌습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그 외에 다른 정황상 증거도 있나요?

이승희 기자 ▷ 네. 있습니다. 우선 당시 배에는 부산까지 항해에 필요한 해도조차 없었습니다. 연료조차 보급 받지 못했고요. 또 우키시마호는 부산이 아닌 일본 본토를 끼고, 인근 해안을 따라 이동했습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네. 여러 정황상 증거와 생존자들의 증언을 종합해볼 때, 물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일본이 고의로 오키시마 호를 폭침시켰다고도 볼 수 있을 텐데요. 만약, 일본의 고의가 사실이라면, 대체 일본은 왜 그런 만행을 저지른 걸까요? 이미 전쟁은 끝났고, 자신들은 진 상황인데 말이죠.

이승희 기자 ▷ 조선인 징용자들을 통한 군사 기밀 유출을 막고, 강제동원의 참혹성을 숨기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데요. 일각에서는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에 대한, 군부의 항명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실제로 일부 해군이, 전쟁에 지지 않았으니 계속 싸워야 한다는 전단을 뿌리기도 했습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생존자들의 주장대로라면, 결국 전쟁에 진 나라가 자신들의 만행을 숨기기 위해 대학살을 저지른 건데요. 대처 방법도 살펴봐야 할 것 같아요. 사고 이후, 일본 정부는 어떻게 대처했나요? 

이승희 기자 ▷ 참사 후 일본은, 원인 규명과 희생자 수습을 위해 전혀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원인 규명과 희생자 수습을 위해선 선체 인양과 사체 수습이 중요한데요. 일본 정부는 유가족의 요구를 무시한 채, 우키시마호를 바다 속에 방치했습니다. 오사카상선이 침몰 선박을 재사용할 목적으로, 일본 정부에 인양을 요구하고 나서야, 첫 인양을 시도했는데요. 인양이 시작된 날은, 사고가 발생하고 5년 뒤인, 지난 1950년 3월입니다. 당시 선미 부분을 인양했지만, 기관 파손 상태가 심각해, 인양은 중단됐습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5년간 바다 속에 방치된 배를 인양하는 게 당연히 쉽지 않겠지만, 그렇게 쉽게 포기한 건가요?

이승희 기자 ▷ 네. 맞습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고철 가격이 급상승하자, 1953년 고철 회수를 위해, 우키시마호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켜 해체했는데요. 그 이후, 조각난 선체 일부를 끌어올려 인양했습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배에 다이너마이트를요? 그럼 안에 남아있는 유해들은요?

이승희 기자 ▷ 그 과정에서 배 안에 남아 있던 많은 사체들이 유실됐습니다. 당시 103구의 유골만 수습됐다고 전해졌는데요. 이 유골마저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일본 전범자들 위패가 보관된, 야스쿠니 신사에 함께 보관된 상태입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800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증언되고 있는데, 100여구에 불과한 유골만 수습이 되었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유해가 바다 속에 그대로 남아 가족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요? 억울하게 죽은 그들이 조국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가슴이 먹먹해지는데요. 이승희 기자, 그럼 보상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 배에 탄 사람들 대부분이 강제 동원 피해자들이니, 당연히 제대로 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이승희 기자 ▷ 보상 역시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그동안 우키시마호 침몰사건은, 해방 이후의 사건이기 때문에, 피해 보상 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했는데요. 또 강제로 동원된 사람들에 대한 보상은, 이미 완료됐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왜 보상이 완료되었다고 주장하는 건가요?

이승희 기자 ▷ 1965년 체결된, 한일 청구권 협정 때문입니다, 일본은 당시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다 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제가 알기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은 아직까지도 논란이 많은 협정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어떤 내용의 협정인지, 그 내용도 짚어볼게요.

이승희 기자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과 일본 사이에 다시 국교를 맺는 문제가 논의되었는데요. 우리는 일본의 사과를 요구했기 때문에 협정이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그 후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부는,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협상에 나섰습니다. 당시 일본은 식민 지배에 대해, 어떠한 사과도 하지 않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부는, 청구권 3억 달러와 경제 차관 3억 달러를 지원받는 대신, 식민 지배의 피해에 대한 모든 배상을 포기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그래서 지금까지도 일본은 그 때 보상은 다 했다. 끝났다고 주장하는 건데요. 분명 우리 정부가 보상금 명목으로 돈을 받은 건 사실이에요. 그럼 그 돈이 피해자들에게도 지급이 되었나요?

이승희 기자 ▷ 그건 아닙니다. 당시 정부는, 1945년 8월15일 이전 피해자에 대해서만, 일부 보상금을 지급했습니다. 광복 후, 9일이 지나 사망한 우키시마호 희생자는 대상에 포함되지 못했는데요. 우리 정부는 우키시마호 희생자들에게는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우리 정부마저 외면해버린 셈인데요. 그럼 대체 이 우키시마호 참사에 대한 보상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누가 노력하고 있는 건가요? 생존자와 유가족들인가요?

이승희 기자 ▷ 네. 보상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은, 그들의 몫이 되어버렸습니다. 생존자와 유가족들은, 1992년부터 94년까지 3차례에 걸쳐, 일본 정부의 사죄와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는데요. 법원은 지난 2001년 사죄 요구를 기각한 채, 한국인 15명에게 모두 4500만 엔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지난 2003년 오사카 고등법원 항소심과, 2004년 최고법원 상고심에서, 패소가 확정됐습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진심어린 사과가 그렇게나 힘든 걸까요? 또 우리 정부도 마찬가지에요. 정부는 여러 차례 위원회 이름을 바꿔가며 일제 강점기 피해자들에 대한 조사와 지원 활동에 나서고 또 지원해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우키시마호 참사에 대해서는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건가요?

이승희 기자 ▷ 진상 조사 대상이, 해방 이전까지 발생한 사건들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수차례 요구 끝에, 해방 전후 이뤄진 사건들에 대한 조사도 이루어졌지만, 형식적인 조사에 그쳤고요. 우키시마호 폭침사건과 관련한 결과물은, 지난 2008년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 규명위원회’에서 내놓은, 우키시마호 사건 소송 자료집 2권에 불과합니다. 그나마도 소송의 의미를 분석하면서 내세운, 우키시마호 사건의 기초 사실 내용은, 일본 정부의 발표를 그대로 인용했고요.

김민희 아나운서 ▶ 한국 정부가 우키시마호 참사를 외면해왔으니, 당연히 제대로 된 조사, 유골 수습 등이 진행되지 못한 거네요.

이승희 기자 ▷ 네. 정부의 침묵이 이어지자,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족회는 지난 2015년, 참사 장소인 마이즈루만을 방문해, 유해 수습을 시도했는데요. 70년간 쌓인 퇴적층으로 인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폭발 원인이나 사망자 수는, 여전히 미궁에 싸여 있는 상태입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우리는 누구보다 침몰 사고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국민들이에요. 세월호 참사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빠르고 적극적인 대응만이 유해 수습을 할 수 있는 열쇠가 되는데요. 이승희 기자, 앞으로도 기대를 해볼 수는 없는 걸까요?

이승희 기자 ▷ 정부는 우키시마호 참사에 대한 진상 조사가 완료됐다는 입장입니다. 지난 2005년,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 규명위원회에서, 희생자에게 2000만원의 위로금을 지급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후 강제동원 피해를 조사하던 위원회는, 지난 2015년 문을 닫았습니다. 위원회의 업무는 행정안전부 산하 과거사 업무지원단으로 이관됐지만, 우키시마호 참사에 대한 추가 조사는 계획돼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해방의 기쁨과 함께 그리운 고향을 찾던 많은 조선인들이 수장되었지만, 그 누구도 사과하지 않고 있는데요. 당시 상황을 말할 수 있는 생존자들조차 이제는 대부분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단 한 명이라도 남아 있을 때, 다시 진상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 같아요.

이승희 기자 ▷ 네. 저를 비롯한 기획취재팀 구성원 모두, 취재 과정에서 답답함을 감출 수 없었는데요. 아직도 생존자와 유족들은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지만, 양측 정부는 진상 규명을 위해 어떠한 노력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의 안타까운 점은, 우리 국민도 일제 강제동원 역사에 대해 무지하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주변에 우키시마호 참사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었는데요.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진실을 밝히기 위한 우리의 관심이 계속되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우키시마호 생존자인 이씨는 함께 고국 땅을 밟았던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며, 이대로 피해자들이 잊히는 게 아닐까 두렵다고 했습니다. 정부가 속히 진상규명에 나서는 것이, 피해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됩니다.

김민희 아나운서 ▶ 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이 취재한 일제 강제 동원 역사 중 첫 번째 시간으로 우키시마호 참사에 대해 알아봤는데요. 우키시마호 참사 진상 규명에 우리의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겠습니다. 그들의 명복을 빌며 이 시간 마칩니다. 이승희 기자, 수고 많이 하셨어요.

이승희 기자 ▷ 네. 감사합니다.

aga4458@kukinews.com

이승희 기자
aga4458@kukinews.com
이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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