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사 프로젝트 ‘하얀 부역자들’ 글 싣는 순서
① 박사 특혜 입학 논란, 서울대에도 있었다
② 서울대 박사 특혜 입학 의혹, 윗선이 무리하게 몰아붙였다
③ 정신건강기술개발사업, 연구과제 기획·선정 ‘밀실 합의’ 의혹
④ 국가R&D 예산은 눈먼 돈? ‘룰’도 ‘공정’도 없다
⑤ 서울대병원 폐쇄병동 폭력의 전말
지난해 쿠키뉴스 탐사보도팀으로 한 통의 제보 메일이 날아들었다. 이메일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과거 서울대학교병원 정신과 보호병동(과거 폐쇄병동으로 불렸다)에서 환자 폭행 사건이 있었고, 다름 아닌 정신과 의사가 가해자였다는 폭로였다. 익명의 제보자는 “충격적이어서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고 적었다.
정신과 보호병동은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안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 환자와 의료진을 제외하면 외부에서 알기 어렵다. 그간 일부 정신병원에서 폭행 등 환자 인권 유린 사건이 발생,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바 있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세상에 알린 이들은 대부분 환자와 보호자였다.
이번에 본지에 어렵게 용기를 낸 내부고발자들은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의료진이라는 점에서 주장의 신빙성이 더해진다.그리고 이들이 입을 열기까지는 20여년의 세월이 걸렸음은 의료계의 위계질서가 얼마나 공고한지를 반증한다. 이번에 쿠키뉴스 탐사보도팀이 처음으로 공개하는 두 건의 폭행 의혹은 처음으로 공개되는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국내 최고 권위의 서울대병원에서 은밀하게 벌어진 환자 폭행은,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 20년 침묵 깬 목소리 줄줄이
- H 교수, 정신과 환자 '폭력 진료'
- 문제제기해도 변화 없어... 침묵 강요 했나
- 서울대병원, "환자 폭행은 범죄"... 조사 의지는 희박
[쿠키뉴스 탐사보도]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생각이 난다. 양심을 속일 수 없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제보자의 일갈이다. 서울대병원 정신과 폐쇄병동에서 벌어진 환자 폭행과 관련해 다수의 제보자들은 한 사람, H 교수를 지목한다. 취재진은 지난해 최초 제보 이후 이 사안을 계속 추적해왔다. 다음은 제보자의 진술을 바탕으로 정리한, 의사의 환자 구타 사건일지다.
지난 1995년 여름, 서울대병원 62병동, 즉 폐쇄병동에는 30대 초반의 김수빈(가명)씨가 입원했다. 김씨는 교통사고 이후 정상 보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폐쇄병동에선 의료진간에 회의가 매주 정기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회의를 마친 후 H 교수는 환자 김씨를 병동 내 별도의 공간으로 데려갔다. 문은 잠겼다. 그리고 폭행이 시작됐다.
“(H 교수는) 환자의 머리를 때리기 시작했다. 위압적인 분위기에서 환자에게 제대로 걸을 것을 명령했다.”
이날의 ‘특별 치료’는 3시간여에 걸쳐 진행됐다. 이후 환자의 보행은 현저히 나아졌지만, H 교수의 난폭한 치료 방식을 두고 의료진 사이에선 뒷말이 오갔다. 그러나 환자의 적극적인 항의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왜일까? 다음의 말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당시만 해도 ‘의사가 왕’인 분위기가 팽배했다. ‘서울대병원에서 의료사고가 나도 환자는 100% 진다’는 말이 오갈 정도였다.”(한 제보자의 증언)
정신과 보호병동(폐쇄병동)은 중증 정신질환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집중 치료를 받는 곳이다. 외부와 단절된 상황에서 환자, 특히 정신과적 질환을 가진 환자의 심리란 위축되기 마련이다. 다분히 억압적인 대우를 받아도 불만을 표하기에는 제한이 따른다. 실제로 환자 김씨는 ‘특별치료’ 이후 별도의 항의를 하지 않았다.
H 교수를 제지할 사람은 없었다. 서열에서 한참 아래인 의료진은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의료진의 무력감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 제보자는 말한다. “(김씨의 사례는) 큰 충격이었다. 늘 마음의 짐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이후에도 수차례 반복됐다.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 것이 견딜 수 없었다.”
◇ 병실에서 환자 따귀 때리고 입 단속
1998년 서울대병원 정신과 보호병동에 입원한 정명윤(가명)씨. 정씨는 종종 돌출적인 행동으로 의료진을 당황케하곤 했다. 한번은 병실에서 모습을 감춰 병동이 발칵 뒤집어졌다. 몇 시간 후 그는 제발로 돌아왔다. 곧 정씨의 병실에서는 손바닥이 뺨에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따귀 두 대를 올려붙인 이는 H 교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취재진은 ‘때리는 소리가 병동에 다 들릴 정도’였다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의료진은 H 교수가 환자를 때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폐쇄병동에서 있었던 일은 드러나기 어렵다. 환자가 증언을 해도 신빙성을 의심받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내부 인원들만 단속하면 된다.”(다른 제보자의 진술)
침묵할 수밖에 없던 당시 상황에 의료진의 자괴감은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의사가 환자를 때린 사실이 알려지면 큰일이었다. H 교수는 의료진을 모아놓고 본인이 왜 때릴 수밖에 없었는지를 강변했다. 환자에게 죄스러웠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게 괴로웠다. 그러나 문제를 삼으면 그 사람만 바보가 되는 분위기였다.”
일반적으로 양극성장애 환자는 조증과 우울의 양 극단을 오가며, 우울할 시 정상인보다 더 심한 자괴감과 모멸감을 경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H 교수에게 뺨을 맞은 환자의 이상 징후는 없었을까? 한 의료진의 증언이다. “환자는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졌다. 이후 그는 퇴원했다. 진위를 확인할 순 없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 20년이 걸렸다
왜 이제 와서 20여 년 전의 일을 들추느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이 말을 바꿔 논하면 20년이 걸려서야 고백할 수 있었다고 이해될 수 있을 터다. 당시 의료진 나름의 해결 모색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윗선에 H 교수의 '난폭한 행동'을 보고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괜한짓을 해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암묵적 강요는 침묵하라는 메시지나 다름없었다.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유동현 센터장은 “내가 그 상황에 있었다면 무척 위축되었을 것”이라며 “(환자 폭행은) 정신건강 장애인을 얼마나 하찮게 보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유 센터장은 이어 “(H 교수에게) 정신과 환자는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을 것”이라고 개탄했다.
다년간 다수의 의료분쟁 사건을 담당한 법무법인 서로의 서상수 대표변호사는 “단 한 번도 의사가 환자를 폭행했다는 사건이나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충격적이다. 환자 폭행이 사실이라면 폭행죄가 성립하지만, 공소시효 등을 고려하면 현 시점에서 처벌은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대병원 측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조모 대외협력실장은 “(의사가 환자를 폭행한 것은) 범죄”라면서도 병원 차원의 조사를 묻는 취재진에게 “대외협력실의 업무가 아니며 병원 윤리위원회 소관”이라고 선을 그었다. 또한 소속 교수를 둘러싼 이번 의혹에 대해 “병원의 공식 입장은 없다”고 말을 아꼈다.
한편, 취재진은 H 교수에게 입장 표명을 요구했지만, 어떠한 답변도 들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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