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찬란하다. 만개한 꽃이 흐드러지는 까닭이다. 4월은 잔인하다. 일시에 낙화하는 애달픔 때문이다. 4월은 아름답다. 꽃이 진 자리에 피워낸 푸른 잎사귀의 정겨움 덕분이다. 꽃처럼, 꽃 같은, 꽃보다 눈부신 아이들을 만났다. 흐뭇한 미소를 가진 아이들, 그렇게 4월이 다시 왔다.
천안행 열차에 몸을 실었던 날은 공교롭게도 세월호 참사 4주기를 닷새 앞둔 시점이었다. 열차를 내린 후 다시 차를 타고 달리길 20여분, 100여명의 청소년들이 재잘대는 광경을 마주한 기자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날 하늘은 파랬다. 서울을 벗어나자 미세먼지도 다소나마 힘이 빠져 있는 듯 했다. 그리고 봄볕은 따뜻했다. 바람은 제법 셌지만, 그래도 봄은 봄이었다. 코앞에 마주하고 있는 산에는 벚꽃과 개나리가 움을 튼지 오래고, 전날 모내기 준비를 마친 논에는 한가득 물이 고여 바람에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푸른 에너지는 아이들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두 달에 한 번씩 천안에 위치한 벤자민인성영재학교 교육관에선 1박2일 동안의 워크숍이 진행된다. 이번 워크숍에 참석한 아이들은 100여명. 5기 신입생들은 첫 대면의 서먹함도 잊고 떠들고 장난치는데 여념이 없었다. 건물 입구에서부터 ‘우와’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벤자민인성영재학교는 대안학교다. 국영수 교과목을 다루지 않는 탓에 ‘미인가’ 대안학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고등학교 1~3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이뤄지는 대안교육은 이곳이 대안학교임을 감안해도 퍽 파격적인 측면이 많다. 이곳의 교육은 공교육의 그것과는 판이하다. 심지어 학습 과정에 ‘국영수’ 대신 독서토론이나 인성 교육이 이뤄진다.
형식적으로 그치고 마는 직업체험은 실제 검증된 사업장에서 2달 동안 직접 아르바이트를 체험케 하는 식이다. 그렇게 직접 번 돈을 아이들은 부모에게 선물을 하거나 국토대장정, 배낭여행에 쓴다. 실용과 파격의 연속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진짜 공부는 교실 밖에서 이뤄진다는 것을. 미인가가 뭐 대수랴. 아이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 사실 교육부도 학교의 교육에 관심이 많다. 이곳의 그것을 공교육에 도입하려는 노력은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워크숍이 진행된 교육관내 단상 전면. 여기에 큼지막하게 붙은 현수막에는 ‘인생을 바꾸는 1년’이라고 쓰여 있었다. 글귀처럼 학교는 1년 과정이다. 수학영재, 영어영재, 과학영재처럼 우리가 아는 ‘공부’ 영재 대신, 평범한 아이들이 이곳의 문을 두드린다. 이 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은 ‘공부를 위한 공부’를 배우지 않는다. 대신 스스로 미래를 ‘노크’하는 법을 배운다.
◇ 일본군 위안부 기념비를 도서관에 세운 소녀
신채은양(21)은 동그란 얼굴에 귀여운 외모의 소녀다. 나이 때문에 소녀라 하기에 어색한 감이 없지 않지만, 아직 앳된 얼굴이니 소녀라 칭하는 게 맞긴 맞을 것이다. 1기 졸업생인 신양은 이날 ‘도우미’를 자처하고 나섰다.
신양은 교육가가 되고 싶다. 공부 욕심이 많던 소녀는 중학교 졸업 후 이곳에서 1년을 보냈다. 엄마의 권유가 컸다. “친구들과 경쟁하는데 지쳐있었던 것 같아요.” 소녀의 집은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았다. 그래서 소녀는 고액과외나 비싼 학원을 포기해야 했다. 선행학습으로 ‘무장한’ 친구들과의 경쟁은 소녀를 힘들게 했다.
“엄마는 제가 안쓰러워 보였나봐요. 처음으로 돌아가자고,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엄마 손에 이끌려 이 ‘학교’에 왔어요.” 대학입시, 수능, 내신, 선행학습 등과는 거리가 먼 이 ‘학교’에 소녀가 처음부터 잘 적응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1년 후 고등학교로 돌아갔을 때 신양은 달라져 있었다.
“오 마이 갓! 온몸으로 느꼈어요. 1년 동안의 시간이 제게 얼마나 소중했는지를요.” 생각이 바뀌자 행동도 달라졌다. 동아리를 만들고 위안부 기념비를 학내에 세우는 일에 소녀는 두 팔을 걷어붙였다. “서로 나누고 도우면 행복해져요. 전 위안부 할머니의 아픔을 우리가 이해하고 공감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석 달 동안 모금해 130만원을 모았죠.” 급식실 앞에서, 때로는 시민들에게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소녀는 도서관에 소녀상을 세웠다. 삭막한 학교안의 이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는 소녀로부터 비롯돼 친구들에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원동력을 소녀는 1년 동안 자신을 마주한 시간에서 찾았다고 말한다.
신양뿐만 아니라 이 학교를 거친 아이들은 자신만의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다. 왕따를 겪어 정신과 약까지 복용했던 한 아이는 철인삼종경기에 도전, 백두대간 1400 킬로미터를 완주했다. 복학 후 전교 1등을 한 친구도 있었다. 비약적인 학업 성취는 일부분이었다. 또래상담 동아리의 지역 연합회장을 맡아 활동하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위한 모금도 거뜬히 해냈다.
수 시간 동안 아이들과 학교 관계자들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던졌다. 고백컨대 기자는 아이들의 이러한 ‘변화’가 무엇 때문인지 지금도 잘 알지 못한다. 도통 모르겠다는 기색을 눈치 챈 한 선생님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에이 아이들에게 1년 동안 자신을 위한 시간을 준거라니까요. 호호.”
이 말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기자는 1년, 아니 6개월, 아니 단 한 달이라도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을 준 적이 있었던가! 내심 충격을 받은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워크숍에서 춤을 추고 체조를 하다 과자를 입에 물고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계속)
김양균 기자 ange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