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와 제도 사이, 좌절하는 만성림프구성백혈병 환자들

나이와 제도 사이, 좌절하는 만성림프구성백혈병 환자들

[인터뷰] 연세의료원 김진석 교수, “희귀질환자에게 치료의 희망을”

기사승인 2018-05-01 08:30:27
만약 암이 여러 장기에 퍼져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받고 있는 환자들에게 쓸 수 있는 약이 있음에도 제도적 한계로 인해 약을 쓸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면 어떤 반응일까. 대부분의 환자들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화를 낼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일들이 임상현장에서 빈번히 벌어지고 있다. 의사들이 치료법을 정할 때면 신체적 건강상태나 질환의 특성 등에 따라 결정해야하지만, 건강보험 급여기준이나 허가사항의 한계로 인해 법률상 ‘나이’ 등 획일적인 기준에 좌우되는 경우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 단적인 예가 만성림프구성백혈병 치료제다. 

만성림프구성백혈병(Chronic lymphocytic leukemia, 이하 CLL)은 백혈구의 일종인 림프구가 종양으로 변하여 골수 내에서 비정상적으로 증식하는 질환이다. 질환이 진행되면 말초혈액 내 림프구 수의 증가 및 림프절 비대가 나타나고, 간과 비장이 커지면서 빈혈 및 혈소판감소증이 발생한다. 

국내에는 매년 150-200명 정도의 환자가 발생하는 희귀질환으로, 완치가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60세 이상 고령층에서 주로 나타나며, 60대 중반에서 70대 초반에서 많이 발병한다. 우리나라도 65세 인구가 전체인구의 14% 이상을 차지하는 고령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면서 CLL 환자도 점차 증가하는 추세다.

문제는 환자가 많이 발생하는 연령대인 65세 이상 70세 미만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적절한 치료 선택지가 없다고 현장의 전문가들이 토로한다는 점이다. 이에 연세의료원 혈액종양내과 김진석 교수(사진)를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어봤다.


◇ 만성림프구성백혈병은 어떤 질환이며 어떻게 발견하거나 예방하나

백혈병은 만성림프구성백혈병 및 만성골수성백혈병, 급성림프모구백혈병, 급성골수성백혈병 등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중 CLL은 서구에서 전체 백혈병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나, 동양에서는 가장 적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에 대한 명확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만성골수성백혈병과 달리 CLL은 발생기전이 복잡하여 많은 치료제의 개발에도 여전히 완치는 어려운 병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개발된 신약이 있지만 국내 보험기준에 제한이 있어 치료에 어려움이 많은 상황이다.

명확한 발병 원인 및 초기 증상이 없어 조기 진단이 어렵다. 간단한 혈액검사를 통해 의심이 가능한데, 대부분의 환자가 우연히 시행한 혈액검사로 백혈구 증가를 발견하여 진단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고령에서의 건강검진 시행률이 높아지면서 과거에 비해 조기 발견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발병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한 예방법도 없다

◇ CLL 환자는 어떠한 치료과정을 거치며, 치료 성적은?

CLL 1기나 2기에는 특별한 증상 없이 림프구 증식만 보이거나 증상이 없는 림프절 종대, 간 비장 종대가 동반되기 때문에 치료에 따른 효과보다 치료로 인한 부작용 피해가 오히려 더 클 수 있다. 따라서 관찰을 통해 적절한 치료 시작시기를 결정하게 된다. 

반면, 3~4기로 진행된 경우에는 보통 바로 항암치료를 시행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동종조혈모세포이식이 고려될 수 있으나, 고령 환자에게는 부작용 발생 위험이 높아 신중히 고려돼야 한다.

다만, CLL은 기본적으로 완치가 불가능하고 재발하는 경우가 많아 생존기간은 병기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보통 고위험군이 아니면 10년 이상 생존한다. 장기간 생존하면서도 높은 재발률을 보이므로 독성 등을 고려해 환자특성에 맞는 적합한 치료제를 사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CLL 치료 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점과 문제는?

치료 시 나이, 전신 상태, 유전자 이상을 동반하는 지 등 생물학적 위험여부 등 환자의 특성을 고려해 최적의 치료제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고령환자에게 독성 높은 항암제를 사용하면 체력적 부담이 크고, 혈액학적 부작용이나 감염 등의 합병증 발생 위험이 높아 생존기간이 짧아질 수 있다. 이에 독성이 낮은 치료제를 주로 사용한다.

현재 많이 사용되는 1차 치료법은 플루다라빈(fludarabine)-싸이클로포스파마이드(cyclophosphamide)-리툭시맙(rituximab) 병용요법인 FCR요법으로, 치료효과는 좋지만 혈액학적 독성이 심하고 감염위험이 높아 주로 65세 이하의 젊은 환자에게만 권고된다. 

더구나 4~5년 뒤 재발확률 역시 높아 2, 3차 치료옵션이 필요한 상황이다. 국내에서도 70세 이상의 환자는 FCR요법에 비해 치료효과는 조금 낮지만 독성이 비교적 적은 오비누투주맙(obinutuzumab)-클로람부실(Chlorambucil) 병용요법인 GCh요법을 1차로 사용할 수 있다. 

문제는 환자가 많이 발생하는 연령대인 65세 이상 70세 미만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적절한 선택지가 없다는 것이다. 65세 이상 70세 미만의 CLL 환자들에게 FCR요법을 사용하기에는 독성이 높아 부담이 있고, GCh요법은 나이 문제로 보험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65세이상 70세 미만 환자들이나 70세 이상이지만 전신상태가 좋은 환자군에서는 벤다무스틴 단독요법이나 BR요법, 오비누투주맙(obinutuzumab)-벤다무스틴(Bendamustine) 병용요법인 GB요법 등을 고려할 수 있다.

이 치료법들은 클로람부실(chlorambucil)을 기본으로 하는 치료법보다 효과는 좋으면서 FCR 요법보다 독성은 낮아 고령환자에게도 적합하다. 그러나, 현재 국내에서는 허가 및 보험급여 문제로 실제 사용에 어려움이 있다.

70세 이상의 환자 중에서도 신체 상태가 젊은 환자와 같이 건강한 경우가 많은데 이런 환자들은 FCR요법을 사용하기에는 독성 위험이 크고, GCh요법을 사용하기에는 치료효과 측면에서 아쉽다. BR요법과 같이 독성 조절이 용이하면서 치료효과는 좋은 선택지 확보가 필요하다.

◇ 환자들의 치료 접근성 향상을 위해 개선되어야 할 점은?

환자마다 치료제에 대한 반응 여부, 이전 치료 병력, 신체에 누적된 독성 등 특성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최적의 치료가 시행돼야 한다. 더구나 CLL 환자는 장기 생존하며 반복되는 재발로 치료가 장기화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 다양한 치료옵션의 확보를 통해 환자 치료 선택권이 넓어져야 한다.

그러나 국내 치료 환경에서는 현실적으로 환자별 맞춤형 치료를 하기 어렵다. 의사의 입장에서 환자 연령에 따라 치료제의 사용 허가와 보험급여를 단순 분류한 기준 내에서 환자에게 최적의 치료법을 권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단순 연령 기준보다는 환자 개별 특성에 따라 보다 유연하게 약제를 선택할 수 있도록 사용허가 및 급여적용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미 해외에서 효과 및 안전성을 인정받아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급여 허가권 밖에 있는 치료제들이 많이 존재한다. 보험급여에는 임상적 근거와 경제적 비용효과성 등 많은 부분이 뒷받침돼야 하겠지만, 해외에서 표준요법으로 인정돼 널리 쓰이는 요법들은 전문가 의견을 받아 선별적으로 지원을 확대해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환자들이 보험이 안 되는 치료약제 때문에 경제적 문제로 치료를 포기하거나 대체요법에 눈을 돌리는 일이 없도록 실질적인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 특히 CLL과 같이 환자 수가 적은 희귀질환은 환자들의 치료법 개선에 대한 목소리가 약하고, 사회적 관심도가 낮은 질환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또한, 해외에서는 혈액암 분야에 다양한 신약 개발과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고형암에 비해 신약 개발 및 임상 연구, 사회적 관심이 많이 부족하다. 따라서 혈액암 치료제 개발 및 급여확대 등 정책적 지원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시급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에 희귀 혈액암 환자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정부와 제약사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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