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재판을 미끼로 정권과 거래한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사법부에 대한 국민 신뢰가 그야말로 바닥까지 추락했습니다.
대법원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특별 조사단’(이하 조사단)이 지난 25일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내용은 충격적입니다. 양 전 대법관 시절 법원행정처가 사법부 숙원사업이던
상고법원 도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상고법원 설치에 비판적인 판사를 감시하는 등 ‘집안 단속’을 한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또 법원행정처는 청와대와 특정 재판을
놓고 연락을 주고받으며 ‘흥정’을 벌였습니다.
지난 2015년 7월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상고법원 입법 추진을 위한 BH(청와대) 설득 방안’ 문건을 들여다볼까요. 이 문건에는 ‘박지원 의원 일부 유죄 판결’과 ‘원세훈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 등 여권에 유리한 재판 결과를 청와대에 대한 유화적 접근 소재로 이용 가능하다는 분석 내용이 담겼습니다. 이 문건에서는 상고법원 도입을 반대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피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직접 요청하거나 청와대 비서실장 등을 협상 통로로 활용하는 방안이 다뤄졌습니다.
또 법원행정처는 '정부 운영에 대한 사법부의 협력사례'를 따로 정리했습니다. 여기에는 국가배상 제한 등 과거사 사건,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사건, 통상임금 사건, KTX 승무원 사건, 전교조 시국선언 사건 등이 사법부가 청와대에 ‘협력’한 사례로 기재됐습니다.
일선 판사에 대한 사찰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양 전 대법관 시절 법원행정처는 상고법원 도입에 비판적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산하 소모임인 ‘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의 동향을 파악하고 대응방안을 궁리했습니다. 지난 2015년 8월에는 차성안 당시 전주지법 군산지원 판사가 법원 내부 통신망 코트넷에 상고법원 도입을 비판하는 글을 계속해
올리자 차 판사의 성격, 재판 준비태도, 가정사, 재산 변동 내용을 파악했습니다. 그가 다수의 판사와 주고받은 이메일까지 사찰했다고 하네요.
국민은 분노했습니다. 정치권
역시 비판의 목소리가 빗발쳤습니다. 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은 “재판 거래 시도 정황은 국가 존립기반을 흔든 적폐로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서
“재판을 거래와 흥정의 대상으로 삼았다니 경악을 금할 수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장정숙 민주평화당 대변인은 “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의
최후 보루인 사법부가 권력의 시녀를 자처한 데 대해 충격을 금할 수 없다”고 개탄했죠.
그런데 사법부는 문제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먼저
이번 사태 책임자인 양 전 대법관과 대법원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조사단이 양 전 대법원장 거부로 조사를 하지 못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강제수사권이 없어 양 전 대법원장이 거부 의사를 밝히자 조사를 포기한 겁니다.
또 조사단은 국제인권법연구회 핵심 판사들을 해외 연수에서 배제하는 방안 등을 검토한 문건을 발견했지만, 대법원이 관련 자료 제출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조사단은 국민 정서와 거리가 먼 발언을 내놨습니다. 지난 25일 관련자들에 대한 형사상 조치를 취하지 않겠다고 못박은 겁니다. 이에 ‘셀프조사’ 한계
논란이 일었죠.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뒤늦게 김명수 대법원장이 사과에 나섰습니다. 김 대법원장은 검찰 수사를 배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죠. 조사단은 지난 28일 “형사상 조치를 취하지 않겠다고 표현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며 검찰이 수사에 착수해 협조를 요청하면 “필요한
자료를 제출”할 것이라고 꼬리를 내렸습니다.
사법부는 이번 사건으로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무려 세 번에 걸친 자체
조사에서 국민이 납득할만한 결과를 내놓지 못하면서 자정능력도 상실했습니다. 상고법원 제도를 도입해
고위법관 기득권을 공고히 하는 데에만 골몰했던 사법부. 한낱 이익집단에 불과한 행태를 보여준 사법부의
‘판결’을 과연 국민이 납득할 수 있을까요. 신뢰를 쌓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사법부의
뼈를 깎는 노력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합니다.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