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온라인 FPS(1인칭 슈팅) 게임 ‘오버워치’에 우리나라 ‘부산’을 배경으로 하는 새 전장 맵이 공개되면서 국내 게이머들의 호응을 이끌었다. 또 게임 내 한국인 영웅 캐릭터인 ‘디바’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 애니메이션 ‘슈팅스타’가 함께 발표되며 이 같은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블리자드는 과거 ‘스타크래프트’, ‘디아블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등 흥행작들에 뛰어난 연출력을 보여주는 영상을 더해 게이머들로 하여금 해당 게임에 더 많은 감정을 이입할 수 있도록 하고 게임 자체의 수명에도 긍정적 효과를 이끄는 행보를 보여왔다.
이번에 공개된 단편 애니메이션은 주인공인 ‘송하나’가 고향인 부산을 지키기 위해 몰려오는 적 ‘귀신 옴닉’들에 맞서 싸우는 모습을 역동적으로 그려냈다. 가까운 미래의 부산을 배경으로 바다 위에서 펼쳐지는 메카닉 액션은 영화 ‘퍼시픽림’ 등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특히 이 영상은 기존에 알려진 송하나의 ‘슈퍼스타’ 이미지 뒤에 그의 고충과 부담감, 희생정신이 있음을 강조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실제 게임에서 사용되는 ‘방어 매트릭스’, ‘다연장 기관포’, ‘자폭’ 등 기술이 멋지게 그려졌음은 물론 인물의 내면 묘사까지 더해 게임 내 세계관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또 이를 확장해나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밖에도 블리자드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최근 영상 ‘노병’ 등에서 등장인물의 이야기와 내적 갈등을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실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그 이야기 서사가 많은 팬들에게 각인되며 15년 가까이 장수하고 있다. 스타크래프트, 디아블로2 역시 영화로 만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영상을 선보였다.
이 같은 영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블리자드는 자체적으로 약 200명 규모의 애니메이션 팀을 갖추고 있다. 보통 한 편을 제작하는 데 60~100명가량이 투입되며 약 9개월에서 1년의 기간이 소요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오버워치 팬 페스티벌’ 행사로 방한한 벤 다이 블리자드 애니메이션 프로젝트 디렉터는 “오버워치의 6:6 슈팅 장르에서 스토리를 풀어내는 것이 사실상 어려워 세계관을 확장하기 위해 애니메이션이 중요하다”며 “‘이 영웅을 하고 싶다’거나 ‘다시 게임을 하고 싶다’는 등 반응이 대체로 긍정적이고 장기적 투자의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함께 한국을 찾은 스캇 머서 오버워치 총괄 디자이너도 “이용자들이 게임 캐릭터와 세계에 더 많이 알게 되고 이를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스토리를 전하기 위한 방법으로 단편 애니메이션이나 코믹스를 활용한다”고 덧붙였다.
국내 게임 업계에서도 이 같은 성과를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간 상대적으로 스토리나 배경 세계관 설정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국내 게임사가 최근 IP(지식재산권)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엔씨소프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엔씨소프트는 최근 국내 VFX(시각특수효과) 업체 포스크리에이티브파티에 220억원을 투자, 협업 체계를 구축하기로 했다. 영화 ‘올드보이’, ‘괴물’, ‘싸이보그지만괜찮아’ 등을 작업한 이온디지털필름 출신 VFX 슈퍼바이저들이 2009년 설립한 회사로 이후 ‘설국열차’, ‘대호’, ‘옥자’ 등을 탄생시킨 업체다.
이를 통해 엔씨소프트가 노리는 목표는 크게 두 가지다. 보유한 게임 IP를 활용한 애니메이션 제작, 그리고 게임 시네마틱 영상 등에 활용할 수 있는 기술력 강화다.
애니메이션 제작은 ‘리니지’, ‘아이온’, ‘블레이드 & 소울’ 등 엔씨소프트의 게임들의 ‘2차 콘텐츠’가 될 전망이다. ‘아덴’ 대륙을 누비는 혈맹 군주의 위용이나 ‘용족’과 맞서는 ‘데바’, ‘홍문파’ 제자들의 모습을 애니메이션으로 보게 되는 날을 기대할 수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엔씨소프트는 기존 보유한 인프라를 활용해 고품질의 영상을 제작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겠다는 복안도 갖고 있다. 별도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게임 플레이 동기를 강화하는 인-게임 영상 수준도 높일 수 있는 전략이다.
이처럼 영상 기술을 확보해 앞으로 게임 내 영상이나 애니메이션 등으로 좋은 연출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은 게임사로써 긍정적인 방향이다.
다만 애니메이션으로 탄생한 엔씨소프트의 게임 이야기에 충분한 매력이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이미 세계관과 이야기가 있는 게임을 다른 문화 콘텐츠로 선보이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부터 미국, 일본 등을 중심으로 게임과 영화‧애니메이션 교차 시도는 수 없이 많이 이뤄져 왔다. ‘어벤져스’ 등 많은 코믹스‧애니메이션 주인공들이 게임으로 태어났고 최근 동명의 일본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국내에서 영화 ‘인랑’이 만들어졌지만 혹평을 받기도 했다.
특히 게임의 영화‧애니메이션화는 만족할 만한 결과를 보여주지 못한 경우가 많다. 성공 사례도 있지만 대부분 게임 홍보를 위한 프리퀄(앞선 이야기), 스핀오프(별개 이야기) 등 형식을 띤다.
그 예로 일본 스퀘어에닉스의 ‘파이널판타지’ 시리즈를 활용한 ‘파이널판타지7 어드벤트칠드런’, ‘파이널판타지15 킹스글레이브’ 등 게임 원작의 전후 이야기를 다룬 작품을 꼽을 수 있다. 고품질 3D 그래픽으로 그려낸 원작의 세계로 팬들을 자극하면서도 중심 이야기는 건드리지 않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는 원작 게임이 좋은 소재와 이야기를 담고 있더라도 이를 다른 문화 콘텐츠로 온전히 녹여내는 것이 쉽지 않다는 방증이다. 영화는 영화로써의 가치를 가질 수 있는 시나리오와 연출, 편집 등이 요구되는 고유 영역이기 때문이다. 벤 다이 블리자드 디렉터도 “(영상 제작에) 정말 많은 노력이 든다”며 매번 새로운 도전에 역량을 키우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밝혔다. 길어야 10분 남짓한 단편 애니메이션이 아닌 2시간여 분량의 영화라면 또 다른 수준의 이야기다.
같은 이유로 캡콤의 ‘레지던트이블’ 시리즈는 실사 영화로 6편 이상 제작돼 적잖은 수익을 냈지만 작품성 평가는 엇갈렸고 3D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다른 작품들도 성공했다고 보기 어렵다. 블리자드의 ‘워크래프트’ 역시 기대 속에 영화화 됐지만 기대를 온전히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엔씨소프트의 게임들이 과연 이들을 넘을 IP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지 물음표를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모바일 게임 강세 속에 ‘리니지M’이 크게 흥행하면서 ‘IP 파워’의 예로 꼽히지만 원작의 인지도를 이어받았다는 의미일 뿐 실제 담긴 콘텐츠의 경쟁력을 평가한 것과는 다르다.
구체적으로 리니지에 그려진 아덴 대륙은 디아블로의 세계만큼 치밀하지 않으며, 장엄한 아이온의 이야기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영웅들처럼 게이머를 이끌지 않는다. 블레이드 & 소울의 화려한 액션이 오버워치의 ‘트레이서’ 같은 캐릭터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 엔씨소프트를 비롯한 국산 IP의 현주소다.
이런 상황에서 엔씨소프트가 VFX 업체와 협업하는 것만으로 매력적인 작품이 탄생할 것으로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포스크리에이티브파티가 중국 알리바바의 투자를 유치한 극장판 3D 애니메이션 ‘건틀렛’ 등 자체 IP 작품 제작까지 나서고 있지만 이 부분까지 채워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최근 2편까지 개봉한 영화 ‘신과함께’ 등을 보면 국내 VFX·CGI(컴퓨터그래픽영상) 역량에 대한 의구심까지 들 수 있다.
신과함께의 CGI를 담당한 덱스터는 국내 VFX 업계 유일한 상장사라는 타이틀도 가진 선두주자 격이다. 이 같은 면으로만 포스크리에이티브파티와 직접 비교하긴 어렵지만 ‘업계 평균 수준’이라는 차원에서 어느 정도 기술력을 가늠해볼 단서는 제시한다.
이 영화에서는 헐리우드 영화 ‘쥬라기월드’를 노골적으로 재현한 CGI 공룡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포스크리에이티브파티가 작업한 영화 대호와도 비교할 수 있는 호랑이 장면까지 시종일관 영상 기술력을 과시한다. 그럼에도 다소 아쉬운 마감 품질과 연출력이 드러난 것도 사실이다. 필시 관객들의 ‘보는 눈’이 높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포스크리에이티브파티의 경우에도 넷플릭스의 지원을 받은 옥자에서는 괜찮은 평가를 받았지만 전신인 이온디지털필름 시절 영화 괴물에서만 해도 ‘괴물’ 자체보다 배경의 와이어 삭제, 간판 묘사 등 작업을 주로 맡았다. 영화계에서는 당연시되는 역할이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고품질 풀 3D 영화를 본격 제작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정리하면, 아직 ‘걸음마’ 단계인 국내 게임 IP와 VFX 기술이 손을 맞잡는다고 글로벌 일류 콘텐츠 수준으로 높아진 이용자들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확언하기 어렵다. 시도 자체에는 박수를 보내지만 게임사는 게임으로 그 역량을 먼저 나타낼 수 있어야 의미 있는 결과물을 기대할 수 있다. 엔씨소프트가 한 차례 프로젝트를 파기하고 다시 만들기 시작한 ‘프로젝트TL’ 등 차기작에서 그 가능성이 보여지길 바란다.
김정우 기자 tajo@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