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병원에 근무하는 의사들은 크게 3개의 계급으로 나뉜다. 병원장과 같은 보직교수와 대학 내 정교수직을 가진 지도교수, 마지막으로 1~3년 단위로 계약하는 임상교수다. 이 가운데 정규직은 보직교수와 지도교수로 전체 의사의 30~40%가 전부다. 나머지 60~70%는 비정규 계약직인 셈이다.
이는 비단 대학병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많은 수의 종합병원급 의료기관의 비정규직 의사는 70% 선이거나 그 이상이다. 공공병원이나 보건소 또한 정규직 비중이 다른 곳보다 조금 많을 뿐 상황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의사는 특수직이라는 이유로 계약직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불안한 고용형태만이 아니다. 주변의 시각마저도 곱지 않다. 역시나 특수직이라는 특성상 실업에 대한 고민이 여타 직종에 비해 크지 않고,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이 보장된다는 점에서 노동자로 또는 비정규직이라고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고 이들이 계약직의 설움, 노동자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실제 한 대학병원에서 10년째 계약을 갱신해가며 임상교수로 근무하고 있는 A씨는 “임금인상은 언감생심, 초과근무수당을 요구하기도 힘든 여건이다. 부탁을 가장한 불합리한 요구나 협조라는 이름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거나 반대할 수도 없는 실정”이라며 “언제고 계약 해지통보를 받을 수 있는 파리 목숨”이라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 “우리는 환자의 생명을 지키는 의사다”
A씨의 심정이 그만의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2017년 동남권원자력의학원을 시작으로 의사들은 계약직의 설움을 해결하기 위한 해법으로 ‘노동조합 결성’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결단을 내리고 ‘의사노조’를 출범한 곳도 있었다.
의사노조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한 곳은 동남권원자력의학원 소속 12명의 의사들로 구성된 노동조합으로, 지난해 12월 18일 국회에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산하 지역분회의 형태로 설립을 알렸다. 초대 분회장에는 김재현 흉부외과 전문의가 이름을 올렸다.
그는 “현실에서 의사들은 병원 경영진의 요구나 심평의학이라고 불리는 정부의 기준 등에 휘둘려 학교에서 배우고 익힌 대로 진료를 하지 못하고 있다”며 “의사도 분명한 노동자이며 단기계약에 묶여 반발하거나 소신을 밝힐 수 없는 철저한 ‘을’이고 ‘병’”이라고 토로했다.
이어 “의사는 병원의 돈벌이 수단이 돼서는 안 된다. 오직 환자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고 고민하기 위해 노조를 결성하게 됐다”면서 “많은 의사들이 노동자의 위치를 자각하고, 비정규직의 설움을 느껴 노조결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아주대병원 등 대형병원을 중심으로 의사노조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아주대병원의 경우 정년을 1년여 남겨둔 원로교수들이 주축이 돼 후배들이 적정진료, 소신진료를 하면서도 고용에 대한 불안을 해소할 수 있도록 의사노조 결성을 고민하고 있는 상황이다.
전공의들이 스스로의 권익을 보호하고 근로환경과 처우를 개선해나가기 위해 2006년 결성됐지만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전공의노조도 최근 쇄신안을 발표하고, 100여명의 노조원의 가입을 이끌어냈다. 안치현 대한전공의협의회장 겸 노조위원장은 병원별 교섭권을 획득할 수 있도록 우선 지원해 전공의들의 노동권이 보장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이사장 양봉민) 산하 중앙보훈병원에서는 지난 7일 이정열 원장 등 보직의사들을 제외한 140여명의 의사들 중 70%가 넘는 108명이 가입한 노동조합이 설립됐다. 중앙보훈병원 의사노조는 상위기관을 두지 않고 병원 내 의사들로만 구성된 노동조합으로, 초대위원장에는 주인숙 산부인과전문의가 추대됐다.
주 전문의는 “나라를 위해 피 흘리고 다친 국가유공자들에게 최선의 적정진료를 해야할 보훈병원이 본래의 사명을 망각하고 환자를 이용해 돈벌이를 하고 실적을 올리라고 압박하는 기이하고 파행적인 진료가 강요되고 있다”며 이에 맞서기 위해 노조를 설립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의사들의 금전적 이익이나 노동자로서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양심적인 진료를 하기 위해, 공공병원으로서의 정상적인 진료가 보장될 수 있도록, 유공자와 환자의 건강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일어섰다”며 환자와 의료진이 모두 행복할 수 있는 정상적인 보훈병원을 만들어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한편, 일련의 움직임을 두고 한 대형병원 소속 전문의는 “노동자로도 의사로도 어려운 상황들이 계속되고 있다. 병원은 정책적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악화되고 있는 수익을 벌충하기 위해 의사들을 쥐어짜고 있지만 의사들은 고용조건과 여건으로 인해 토조차 달지 못했다”면서 “억눌렸던 소신과 신념, 혹은 피해의식이 표출되고 있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이어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의사노조가 결성되는 경우가 더 늘어날 것”이라며 “더 이상 과거의 얌전하고 피해를 감내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나가려는 의사는 없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 병원도, 정부도 함께 변해야한다”고 경고성 어조를 담아 조언을 남기기도 했다.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