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이하 한사성)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서랑·여파·승진·리아·효린 활동가입니다. 불법 유출 영상 혹은 몰카로 불리는 범죄영상을 삭제·추적하는 그들의 이야기부터 들어보기로 했습니다._편집자 주
◇ 평범한 사람들
서랑 활동가는 친구들과 무난히 잘 지내고 공부도 열심히 하던 학생이었다. “대학에 다닐 때는 밴드를 하면서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사회적 약자 이슈, 사회적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어요.”
서랑은 대학 친구들과 토론을 하며 인권 감수성을 키워갔다. 그는 여성폭력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여러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여성인권운동이 하고 싶단 열망을 누를 수 없었다. 고민은 휴학으로, 다시 여성인권운동으로의 투신으로 이어졌다. 결국 서랑 활동가는 대학원을 중도에 그만뒀다.
여파 활동가는 부모님과 선생님의 말을 잘 듣는 모범생이었다. ‘모나지 않게 행동하는 모범생’이었지만, 마음속에 사회 부조리에 대한 반항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촛불집회에 나가 구호를 외쳤던 그는 대학입시를 보고 제도에 맞춰 진학 하는 과정에서 이런 반항감을 삶에 녹일 용기를 잃어버렸다. ‘대학만 마치면 취직이나 잘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승진 활동가는 스스로 ‘분노가 꽤 많았다’고 말한다. 모나고 융통성도 부족한데, 일단은 그냥 바른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타고난 성격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고교 재학시절 학생회장이던 그에게 교장 선생은 ‘너는 학생회장이지 노조위원장이 아니’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당시를 떠올리며 승진 활동가는 “어릴 때부터 활동가가 될 기질이 있긴 했었다”고 했다.
리아 활동가는 아웃사이더였다. 그룹에 어울리지 않고 이질적으로 남아 있는 성격이었다. “규격화된 교육 제도에 적응하지 못해서 하루 종일 잠만 자거나, 쉬는 시간에 구석에서 혼자 책을 읽었어요.” 대학에서도 ‘아싸’로 살았다고 한다. 리아 활동가는 질문이 많은 학생이었다. 세상엔 그가 납득할 수 없는 규칙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곤란한 질문을 곧잘 던져 또래 친구들과 연장자들에게 종종 눈총을 받기도 했다.
반면 효린 활동가는 사람을 좋아하고, 쾌활하고 사교적인 사람이었다고 했다.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하는데 스스럼이 없고 새로운 시도들을 즐겼다. 그러나 자신을 잘 돌보는 편은 아니었다. “지치거나 상처를 받으면서 심하게 우울할 때조차 저를 방치했던 것 같아요. 사람을 사랑하지만 미워하기도 한달까요..”
◇ 디지털 성범죄를 최초 접했을 때
서랑 활동가는 소라넷 사이트를 접하게 된 후 문제의 심각성을 알게 됐다. 당시 여러 페미니즘 활동을 하던 서랑 활동가는 자연히 소라넷 이슈에 대해 적극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소라넷은 디지털 성범죄의 온상이었다. 자고 있는 아내의 성기사진을 찍어서 서로 품평해달라고 올리는 게시글, 여자친구와의 성관계 장면, 공공장소에서의 치마속을 찍은 피해촬영물, 심신미약 상태로 기절한 여성의 성기에 빗이나 칼을 꼽은 사진들 등. 서랑 활동가는 디지털성범죄와 사이버성폭력의 온상지인 소라넷을 모니터링 하면서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리고, 생각만으로 멈추지 않고 적극적인 액션을 시작했다.
여파 활동가는 다니던 학교의 ‘여자화장실 몰카’가 인터넷에 돌아다닌다는 소문을 들었다. 친구들은 그 영상에 나왔다던 화장실을 쓰지 않고 다른 층 화장실을 가기도 했다. 소라넷이나 남초커뮤니티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실체를 접하고 나서 여파 활동가는 더욱 큰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여성의 몸을 도구로 보는 문화가 있고, 사진이나 영상뿐만 아니라 여성들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글도 많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어요.”
승진 활동가에게 연애 경험은 공포로 돌아왔다. 전 남자친구가 뭔가 찍은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된 것이다. “혹시 몰라 남초커뮤니티, 토렌트, 텀블러 등을 매일 밤마다 뒤지고 댕기다가 어느 날은 ‘이게 뭐하는 짓인가’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왜 여성들이 이런 고통을 느끼고 계속 불안해해야 하는지 몹시 화가 났다고 했다.
리아 활동가는 유년 시절부터 폭력적인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다고 했다. “전 소득 수준이 낮은 동네에서 자랐고, 장애나 성별에 대한 폭력에 늘 노출돼 있었습니다. 여성 살해나 매 맞는 아내, 성범죄 사건을 보고 자랐죠. 저 역시도 초등학생 시절 범죄 피해를 당할 뻔 한 경험이 있었고요.”
어른이 되면 성폭력 문제와 빈곤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이렇게 본인이 활동가가 되어버릴 줄은 몰랐다. “다른 일을 해서 돈을 번 다음 후원을 한다든가 학교를 지원하며 살 줄 알았어요.”
리아 활동가는 중학생 시절부터 이러한 사이버 성폭력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무력감이 더 컸어요. 어차피 조심해도 소용없는 일이니까 일정부분 포기하고 있었어요. 변화의 필요성이야 언제나 느끼고 있었지만 방법을 찾을 수 없었죠.”
‘페미니즘 리부트’가 일어나고, 리아 활동가처럼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에 분노를 느끼던 사람들의 존재가 점점 많이 드러나는 것을 보면서 용기가 생겼다. “이 싸움에 승산이 생겼다고, 내 삶의 일부를 한 번 걸어볼만 해졌다고 느꼈어요.”
효린 활동가는 웹XX의 19금 카테고리에서 우연히 ‘국산 야동’을 접하게 됐다. 영상 스크린샷 사진이 꼭 본인 같아 보였다.
“너무 저와 닮아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당시의 헤어스타일이나 신체적 특징, 이목구비가 너무 비슷해보였어요. 너무 충격을 받았고 놀라서 노트북을 덮은 채 밤새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이 영상이 나인지, 스크린 샷에 보이는 저 장면이 정말 나인지, 어디인지, 언제인지, 이런 것들을 계속 생각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동틀 무렵 그는 용기를 내고 영상을 다운받아 재생했다. 본인이 아니었다. 안도감과 동시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이러한 ‘야동’들이 결코 ‘야동’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첫 순간이었다.
“저 여성은 본인의 영상이 인터넷에 떠돌고 있다는 걸 알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안도감이 불편하게 느껴졌어요.”
◇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활동 시작 전
서랑 활동가는 대학원 입학 후 휴학을 할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페미니즘 관련 잡지활동, 페미니즘 이슈를 다루는 인터넷 방송, 페이스북 페미니즘 페이지 운영, 페미니즘 굿즈 제작 등의 활동을 하고 있었다. 페미니즘 이슈를 여러 콘텐츠로 풀어내는 활동을 이어가면서도 그는 진로에 고민이 많았다.
여파 활동가는 대학원 진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페미니즘 공부가 하고 싶어 여성철학을 공부할 작정이었다. 한사성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활동과 대학원준비를 병행하려고 했지만, 지금은 한사성에 온전히 투신하고 있다. 그는 말한다.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장이 어떤지 알게 되었으니까요.”
승진과 리아 활동가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승진 활동가는 한강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기도 했다. 리아 활동가는 알바와 학업을 병행하고 있었다.
효린 활동가 역시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내 CS강사였던 그는 인권에 관심이 많았다. 페미니스트로서 자기 정체성을 찾게 되면서 직업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CS 분야는 매우 비인권 적이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콜센터나 고객응대 영역 종사자의 대부분은 여성이고 저임금에 복지가 부실한 경우가 많죠.”
한 여직원은 고객에게 성희롱과 성적인 모욕을 들은 후 효린 활동가에게 피해 사실을 알렸다. 효린 활동가는 이 사실을 상부에 알렸다. 그와 피해 직원은 회사 차원의 대응을 원했다. 그러나 대응도 직원 보호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효린 활동가는 해당 직원이 ‘고객 불만’을 일으키지 않도록 추가 교육을 해야만 했다.
“이 일을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실제로 수행하면서 많이 고통스러웠습니다. 직업이 페미니스트일 수 없을지 계속 고민하며 여성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 한사성에 함께하게 되었어요.”
◇ 한사성 합류를 결정하게 된 이유
서랑 활동가는 사이버 성폭력 피해지원을 하는 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단체를 만들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 함께하자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없는 건 아니었다.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을까. 최소한의 활동자금을 만들 수 있을까. 영영 비주류의 삶을 살며 앞으로의 인생이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어요.”
여파 활동가는 지인으로부터 한사성 합류를 제안 받았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땐 우리가 지금과 같은 형태로 성장할 거라는 예상도 기대도 없었어요. 다만 우리가 해야 한다고 여긴 일들을 열심히 했을 뿐이었죠.”
승진 활동가는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취업 준비에 한창인 와중에 지인으로부터 합류 제안을 받았다. 딱 한 달만 일하라는 제안이었다. 그는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다. 아무것도 없는 밑바닥부터 시작해보고 싶었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잃을 것이 없을 때 사회를 위해 몸 한번 불살라보자는 생각에 시작하게 됐어요.”
리아 활동가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서랑 대표로부터 “함께하자”는 제안을 받고 한사성을 직업으로 선택했다.
효린 활동가는 “목마름이 있었다”고 했다. “당시 페미니즘이 제 삶에 거대한 영향을 주고 있었고 저는 너무나 갈증을 느꼈습니다. 계속해서 페미니즘을 알고 싶고 나누고 싶고 공부하고 싶었어요. 주변에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다른 페미니스트와의 만남에 간절했고 무척 외로웠어요.”
지난해 초 효린 활동가는 ‘2030 페미니스트 캠프’에서 만난 지인으로부터 한사성 활동을 권유받았다. 같은 해 하반기에 외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삶의 계획을 바꾸는 결정이 쉽진 않았다. 고민은 깊고 치열했다.
“퇴사 후 한사성에서 상근활동을 하며 치열한 매일을 살아내고 있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다시 결정할 기회가 와도 한사성 활동을 선택할 것 같습니다.”
◇ 생계가 보장되지 않는 생활
서랑 활동가의 부모님은 그의 한사성 활동을 결사반대했다. 대학원 동기들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돈도 안 되고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미친 짓을 그만두어라. 나중에 후회할 것이다. 대학원으로 돌아가라. 이런 문자메시지와 이야기를 반복하셨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이 일을 이어나갈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친구 집을 떠돌다가 우여곡절 끝에 보증금 없이 월세 10만 원짜리 반지하 골방에 얹혀살 게 됐다. 부모, 친구, 서랑 본인조차 이 불확실하고 어려운 일에 대한 확신이 없던 시절이었다.
여파 활동가의 고민은 현재진행형이다. 집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그는 학자금대출 때문에 수천만 원의 ‘빚’이 쌓여있다. 지난해까지는 주말에 마트에서 갈치를 파는 아르바이트로 연명했지만, 이마저도 병행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 지금은 갈치 판매를 그만두고 한사성에 집중하고 있다.
“만약 알바가 아닌 한사성을 관두고 한사성에서 일을 하듯 갈치를 팔았다면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었을 거예요.”
승진 활동가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지금 받는 활동비론 저축을 할 수도 없고, 친구들의 생일이나 사람을 만나야 하는 날이면 부담이 됩니다. 교통비와 휴대전화 요금을 내면 30만 원 정도가 남이 남아요. 앞으로 내 인생이 어찌 될지도 모르는데, 모아둔 돈도 없어서 나중에는 진짜 어찌 살아야할지,,, 걱정이죠.”
리아 활동가는 한사성 활동 초기 “너무 무서워서” 새벽마다 울었다고 했다. “저한텐 저밖에 없어요. 절 돌봐줄 가족이 없어요. 한 달에 100만원도 받지 못하는 일을 한다는 건 사실 제정신이 아닌 거겠죠.”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하던 효린 활동가가 한사성 합류를 결정했을 때 주변의 우려는 컸다. 새로운 도전이나 모험을 하기엔 적지 않은 나이라는 말부터 과격한 페미니스트가 되어 분노를 표출하고 다니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냔 걱정도 있었다.
“처음이나 지금이나 앞날이 잘 그려지지 않아 걱정이 되긴 합니다. 당장 생계유지에 대한 부담이 있었고 30대의 금전적 고민들이 있었습니다. 결혼계획과 부모님의 노후 등 제가 짊어질 삶의 무게들이 있지만, 결국 제가 하는 이 일이 제 삶 뿐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한사성은 내 삶의 몇 퍼센트일까?
서랑=“90% 이상”
여파=“지금은 90%”
승진=“100%가 되지 않도록 노력 중”
리아=“90% 이상”
효린=“내 삶은 한사성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 한사성 활동으로 얻은 건?
서랑=“삶의 주체성, 사랑하는 동료들, 여성운동에 대한 갈증 해소, 다양한 경험”
여파=“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 것, 전우이자 친구이자 선생인 동료들”
승진=“내 두발로 온전히 서 있는 나 자신, 그리고 나 자신만큼 중요하고 사랑하는 동료들”
리아=“동료들, 더 큰 스피커, 세상의 변화에 일조하고 있다는 감각”
효린=“연대할 수 있는, 대체 불가능한 자매들과 동료들”
◇ 한사성 활동으로 잃은 건?
서랑=“건강, 연애, 취미, 통장 잔고..”
여파=“돈, 사회적 인정”
승진=“남동생, 몇몇의 친구...?”
리아=“돈, 건강, 취미 생활을 할 시간”
효린=“앞으로 부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
◇ 남몰래 눈물을 흘릴 때
서랑 활동가는 한사성 동료들을 보며 눈물을 많이 흘린다고 했다. “단체는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일하는 거라 자원이 있어도 함께 해나가기 쉽지 않은데, 우리는 자원도 없이 해나가고 있으니까요.” 그는 동료들에게 고마움도, 미안함도 많다.
여파 활동가는 한사성 간담회 등의 자리가 끝나면 종종 울음이 터진다. 사이버 성폭력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에서 싸워야 하는 대상이 가해자 한 명이 아닌, 거대 산업이라는 사실에, 또 우리의 인식이라는 점을 절감할 때 그의 눈은 붉게 젖는다.
승진 활동가는 때때로 무력감에 눈물이 난다고 했다. “‘주적’이 눈앞에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 주적에게 싸바싸바할 때.. 우리가 너무 작고 힘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눈물이 나요).”
리아 활동가는 이틀에 한번, 삼일에 한 번씩 운다. 디지털 성범죄 사건 때문에 화가 나서 울거나 불안한 미래가 걱정될 때면 눈물이 난다. “슬프다기보다 스트레스가 너무 많이 쌓여서 자연스러운 신체반응으로 눈물이 나오는 것 같아요.”
리아 활동가는 피해자 영상을 삭제할 때 괴로움이 밀려온다고 했다. “가해자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고 답답하니까 울 때가 많아요. 거의 모든 성폭력가해자는 자신이 억울하다고 하고 피해자의 신고로 자기 인생이 망했다며 너무 뻔뻔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효린 활동가도 한사성 활동을 하면서 울 일이 “너무 많다”고 했다. “분노와 아쉬움, 안타까움, 고통 등 다양한 통증을 항상 느끼는 활동을 하다 보니 많이 울게 되는 것 같아요.”
*다음카카오 스토리펀딩 플랫폼에서 ‘사이버성폭력 잡으러 한사성이 간다’에서 후원이 가능하며, 아울러 기획 의도와 연재물을 볼 수 있습니다. 김양균 기자 angel@kukinews.com